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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20. 2021

본격 스페인 탐방 III. 추억 가득한 스페인 남부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스페인의 추억이 가장 많이 물들고 떠올리는 곳,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Andalucía로 내려갑니다. 타들어가는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 화려한 원색 옷감으로 더 화려함을 뿜뿜하는 주민들, 플라멩코와 투우 경기의 심장 터질듯한 박진감, 그 와중에 터지는 박수갈채와 '올레'의 탄성, 입 안 혀 끝에서 싱그럽게 착 감기는 달달한 상그리아 (상구리아 常口利雅 항시 입안을 이롭고 맑게 하는 것이라며 아재개그 작명도 한 번 해 봅니다)... 그 무엇을 떠올려도 다 됩니다. 스페인이니까요. 아니,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니까요. 


아카시아와 라일락의 향 100배의 농도는 될 것 같은 하얀 오렌지 꽃 아사아르Azahar의 진한 향기 속에 취해보고, 평범한 길조차 중남미가 원산지인 연보라 빛 하카란다Jacaranda 가로수가 만드는 환상의 나라로 빠져 보기도 합니다. 자기 PR 시대를 넘어 개인 브랜드를 만들어는 시대의 트렌드 속에, 평범하게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그런데 이곳 안달루시아에서는 평범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서만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워낙에 저마다 내뿜는 열기와 에너지가 가득해서지요. 그래서 유럽인의 눈에도 이국적인 스페인 조차 가장 그 정취가 진하게 베인 곳을 찾으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안달루시아를 꼽는듯 합니다.


안달루시아는 <반달족이 사는 땅>이란 뜻의 아랍어 <알 안달루스 الأَنْدَلُس>에서 나왔습니다. 이제는 '알'하면, 알아요, 알압어죠! 하는 분들 계실 겁니다. 크흐, 잘 하셨습니다! 잠깐 역사를 살펴보죠.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에 의해 476년 멸망한 이후, 본격적인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지요. 스페인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르만족의 분파는 반달족이었고, 이후에 고트족, 그 중에서도 서고트인들이 정착합니다. 반달족은 거쳐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파괴하고 방화해서 남기는 게 없는 걸로 유명한 야만족이었습니다. (홍익인간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 배달겨레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겁니다, 암요) 그런 반달족의 악명은 반달리즘 vandalism 이라는 말로 남아 있습니다. 문화유산, 건축물, 자연경관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요. 


정착 대신 끊임없는 이동으로 떼강도와 다를 바 없이 살았던 그들이라 해도, 피레네 이남의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 남진을 거듭한 끝에 남부 지중해 연안에 다다르고 나니, 더는 갈 길이 없었을 겁니다. 물론 일부는 배 타고 건너가 북아프리카까지 가기도 했겠지만, 대다수 남은 반달족은 어쩔 수 없이 눌러 앉아 살게 됩니다. 거기서 유래된 알 안달루스는 훗날 남부 뿐 아니라, 이슬람 세력이 대대적으로 북진해서 카톨릭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손에 넣어 왕국을 세웠을 때도 사용하는 이름이 됩니다. 나중에 카톨릭계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으로 영토를 잃어갔을 때에도, 남부는 마지막까지 무슬림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까닭에 안달루시아는 유럽과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뭔가 그 흐르는 기운이나 정취는 아랍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게르만이나 코카시안계의 백인들과는 다른 구릿빛이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구불거리는 흑발, 작은 키와 같은 외모부터, 한 상 크게 차려놓고 저마다 나눠먹는 식문화라든지, 유달리 신체접촉이 잦은 관습 (코로나 때문에 자제 중이긴 하지만) 등 우리와도 얼핏 비슷한 점을 느끼게 합니다. 다르면서도 닮은 그 점이 매력이 되어, 밤을 헤아리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안달루시아! 그 중 대표적인 도시 세 곳을 둘러 보겠습니다. 별도로 이번 편은 사진 대신, 짧고도 아름다운 동영상으로 남부 각 도시의 추억을 전합니다. 영상 링크는 글 끝에 두었습니다.



1. 이슬람의 추억, 코르도바 Córdoba


코르도바는 10세기 당시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비교불가 차원으로 맹위를 떨치던 이슬람 왕국이었습니다. 타 유럽 도시 보다 자릿 수 하나가 더 많은 50만에 육박하는 인구로, 돈이 모이고 교육 시설부터 상점과 병원, 대학,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문화에 있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지요. 유럽 어디에서건 핍박 속에 있던 유대인들이 이 땅에서는 자유를 약속받았기에, 적극 무슬림 통치에 협력함으로 코르도바는 상당한 부를 이루었습니다. 이슬람의 앞선 수학, 기하학, 과학이 발달하며,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마이모니데스, 아베로에스 등과 같은 스타 학자들도 배출합니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당대의 군주들 압데라만 1세, 히샴 1세 등에 이어 최전성기를 세운 알 만수르 재상 등에 이르러 그 시대에 가장 큰 모스크 사원(Mezquita 메스키타) 건축하고, 확장과 증축 공사를 거듭합니다. 그 결과 180m x 130m, 거기에 수용인원 2만 5천 명이라는 경이로운 크기의 종교건물을 세우지요. 동시대의 다른 도시 인구 전체가 들어가도 될 정도의 건물을 만든겁니다. 신을 향한 종교적인 열심도 있겠지만, 그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자기들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내세우고 싶었던 점이, 더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지어진 최대 규모의 사원은 1236년, 카톨릭계 스페인의 페르난도 3세에게 도시전체가 탈환된 이후, 후대에 건물의 일부가 대성당으로 개조 됩니다. 완전히 허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도의 건물을 따로 지은 것도 아닌, 이슬람 사원 속 대성당이 세워져 <사원-대성당>이라는, 역사 이래 유일무이한 독특한 건축물이 재탄생합니다. 입장권을 끊어 방문해 보면, 독특한 말굽 양식의 아치 기둥에서 여기가 유럽 맞나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어 엇갈린 아치처럼 건축기술을 고도로 발달시켜 예술의 경지로 올린 칼리파 양식을 보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기도실 미흐랍의 황금장식과 같은 이슬람 모스크를 보면서 넋이 나가기 시작합니다. 카톨릭 성화와 미사에 사용되는 기구들을 모아 놓은 성물실을 지나, 웅장한 오르간과 성모승천의 성화로 위엄을 더하는 대성당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둘러보는 동안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잠시 잊게 되는 마법에 빠지기도 하지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알카사르며, 카톨릭 왕국 시대의 개선문, 그걸 이어주는 로마의 다리, 다시 그 끝에 바라보는 이슬람의 칼라오라  등 뒤엉킨 역사만큼이나 유적 또한 천일야화의 스토리텔링이 이어져 갑니다. 한편, 성인 두 명 정도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골목 곳곳에 섞여 있는 일반 가정, 상가, 커피숍, 식당들을 오밀조밀 탐색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 길과 광장에서 만나는 코르도바 출신 위인들의 동상과 흉상을 보며 이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대신 떠올려봐 주는 것도 재미난 일이 되고요. 집집마다 알록달록 꽃과 화분으로 화사하게 장식된 파티오를 보면, 마음이 아름다워지지 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습니다. 코르도바는 이슬람의 추억이고, 나는 코르도바의 추억이 됩니다.



2. 플라멩코의 추억, 세비야 Sevilla


<세비야는 탄생하는 곳 Sevilla para nacer>이라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스페인 현대 문학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가 남긴 문구인데, 세비야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온몸으로 그걸 느낍니다. 스페인이 황금의 시대를 누렸던 16세기, 식민지와 무역 사업으로 독점권을 가져 모든 부가 집중되었던 곳이지요. 과거의 화려한 영광이 뒤흔들었던 이 도시를 다니다 보면, 내면에 감춰졌던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꿈틀대고 분출되어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세비야는 예술계에서도 알아주는 도시가 되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비제의 <까르멘>,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등 오페라의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산타 마리아 대성당> 이라든지, 바로 옆에 위치한 <알카사르 왕궁>, 근대 중남미에 대한 숱한 자료가 보관된 <인디아스 고문서관>, 세비야 박람회를 기념해 타일과 벽돌로 멋지게 조성한 <스페인 광장>, 그 옆에 나무가 우거진 쉼터 <마리아 루이사 공원>, 코르도바에서 이어지는 과달키비르 강 옆에 자리잡은 <황금의 탑>, 현대 세비야의 상징 <메트로폴 파라솔>, 지금도 열리는 세비야의 <투우장>, 바로 그 옆의 오페라 하우스 <마에스트란사 극장>, ... 세비야를 소개하는 데에도, 그 중 하나만 꼽아 제대로 둘러보고 체험하기에도, 하루는 너무도 빠듯합니다. 


낮의 화려함 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저녁 시간, 타블라오tablao에서 펼쳐지는 플라멩코Flamenco 공연입니다. 무슬림의 기도문을 읊는 것인지, 인도 발리우드에서 따온 것인지, 알듯 말듯한데도 듣는 순간 귀를 잡아 끄는 노래, 남녀 무용수가 스치듯 말듯 밀당의 고수들이 손끝과 발끝에서 터져나오는 요란하고도 절도있는 역설의 동작들, 현란하기 그지 없는 플라멩코 기타의 선율. 이 모든 것이 공연시간 내내 몇 번이고 감탄하며 몰입하게 만듭니다. 공연은 끝났지만 플라멩코의 흥분과 아릿함은 혼령이라도 된 듯 따라 다닙니다. 그 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지금이라도 춤을 배워볼까 하는 농반진반의 말도 툭툭 튀어 나옵니다. 


하여, 처음에 소개한 시인 로르카의 말에 조금 더 보태보고 싶습니다. 나이를 떠나 도시가 내뿜는 에너지에 젊음의 감흥을 되찾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그렇게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고, 시간을 되돌리는 일을 경험하는 곳이 바로 세비야라고 말입니다.



3. 알람브라의 추억, 그라나다 Granada


앞에서 언급한 시인 로르카의 고향이 이곳 그라나다입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해진 겨우 서른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극작가이기도 하지요. 세비야를 두고 태어나는 곳이라 칭했던 그는 이어 그라나다를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Granada para morir
그라나다, 영면永眠하는 곳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그라나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부터 살펴 봅니다. 그라나다 = 알람브라, 이 등식이 성립되어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 명곡 <알람브라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과 현빈 주연의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하지요. 참고로 알람브라는 스페인어고, 알함브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둘 다 동일합니다. 타레가의 고요한 기타 선율 속에 흐르는 따스함은 마음의 정원 연못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기타줄을 퉁기며 트레몰로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손가락에서 타오르는 멜로디는, 하염없이 보고 싶고 껴안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게나 만나고 싶음에도, 물리적인 거리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 시국 때문에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나만의 절절한 그리움의 노래이자 시입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 최후까지 이슬람의 지배 아래 남겨진 왕국이었습니다. 1492년 레콘키스타의 완성은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를 함락함으로 이루어졌지요. 당시 술탄(왕)이었던 무함마드 12세는 알람브라를 두고 떠날 때 이 아름다운 알람브라를 다시 못 본다며 슬퍼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있지요. 언제나 시작보다 종결부에 미련이 남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승리자인 카톨릭에서야 기세등등하게 자신들의 세계를 연다며 자축하겠지만, 물러가는 아랍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두 카톨릭 왕 부부는 1492년 처음으로 완전한 스페인 통일 왕국을 이룩한 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개종시키고, 따르지 않으면 칙서를 내려 강제추방하기에 이릅니다. 위정자들이 어떻게 바뀌건 간에, 서민의 입장에선 그래도 나름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왔을텐데요. 하루 아침에 뒤바뀐 주인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내쫓김을 당한 당사자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 볼 수 있을까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마음과 자세로 그래도 한번 더 뒤돌아 볼까요, 아니면 울분 가득, 원수의 땅이라며 쳐다도 안 보게 될까요. 압박을 피해 살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이 갈 곳이라곤, 어지간 해선 발길이 닿지 않는 버려진 땅,  산골짜기 깊숙히 험하게 경사진 길을 따라, 가족과 세간살이를 꾸리고 들어가 어떻게든 버텼을 것입니다.


이슬람의 통치자는 떠났지만 영문도 모른채 남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거주민의 입장에선, 종교 하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카톨릭과 이슬람 양편을 오가며, 그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변절자로 낙인 찍혀 힘들게 살다, 선조를 따라 땅으로 돌아갔겠지요. 기구한 생애의 이야기가 줄을 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이들의 구전 속에 그라나다는 탄생의 기쁨 보다는 사후死後를 생각해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에만은 아니겠지만, 플라멩코 공연도 세비야에서 볼 때와 그라나다에서 접할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은, 미처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무언가가 분명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코르도바 보다도 더 구불거리는 골목길과 가파른 비탈길에 다닥다닥 붙어 세워진 집들을 거닐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고, 휴대폰 데이터 마저도 잘 안 잡혀, 지도 보기에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나 불편한 곳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고민은, 그간 너무 편한 것에만 길들여진 이방인만의 괜한 불평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겐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엄마 품에서 커오고 (좁은데다 우둘투둘한 돌길이라 유모차갖고 다니기가 정말 힘들어요), 나중엔 형, 누나의 손을 붙잡고, 아빠의 무등을 타고 수없이 오가며 익힌 길이니까요. 그저 부처님 손바닥 보듯, 정겨운 이야기와 추억이 시간과 함께 묻혀 있는 곳일테지요.  


이곳을 다녀간 세계 유명 연사들이 남긴 문구를 한번 음미해 봅니다. 


Dale limosna, mujer, que no hay en la vida nada como la pena de ser ciego en Granada. - Francisco de Icaza 

장님에게 돈을 주시오, 여인이여,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 것보다 더한 슬픔은 없으니. 

-프란시스코 데 이카사 (멕시코 시인)


Grenade frémit au point de défaire et faire fondre tous les sens. -Henri Matisse

그라나다는 모든 감각을 풀고 녹일 정도로 전율하게 만든다. -앙리 마티스


If you were to visit just one city in Spain, it should be Granada. -Ernest Hemingway 

스페인에서 단 하나의 도시를 가야한다면, 그것은 그라나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Granada, the most beautiful sunset in the world. -Bill Clinton 

그라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 -빌 클린턴   


시간은 무엇이든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포장시키는 놀라운 마술을 부립니다. 와인처럼 묵히면 묵힐 수록 그 깊어지는 향과 감미로운 풍미가 저마다의 마음 한 켠에 있습니다. 이슬람과 플라멩코, 그리고 알람브라의 추억이 깃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경험이, 여러분의 일상에 두고두고 꺼내볼 사진첩이자, 인생에 맛을 더해 줄 와인이 되길 바랍니다. 평범한 일상조차 멋진 경험으로 만들어 가는 당신을 위해 ¡Salud 건배! 




더 많은 스페인 여행 이야기는 여기에서

https://brunch.co.kr/magazine/spainwithkids




코르도바 소개 2분 영상 (코르도바 관광청 제작)

https://youtu.be/Us3hTNxtQ18




세비야 도시 소개 3분 영상

https://youtu.be/9-PCsRiv6Us


세비야 플라멩코 1분 영상

https://youtu.be/qGJiHpJK4f8?t=10 




그라나다 소개 3분 영상

https://youtu.be/hN1pIS-8zoY


<알람브라의 추억> 연주 영상 (이사벨 마르티네스 연주)

https://youtu.be/ftrgOaT0YrQ?t=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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