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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27. 2021

나쁜 감정 버리기 연습

상처와 트라우마

만월은 틀린 말이다. 

달이 꽉 찬 듯 빛날 때에도 달의 반면은 어둠 속에 있다.

더 많이 가지려면 더 많은 죄를 저질러야 할 지도 모른다.

내가 충만할 때도 누군가는 울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사람은 비로소 아름답다.


-<힐링> 박범신


Q. 지금 당장 버려야 할 물건이 있다면


A. 할 수만 있다면, 감정을 물건으로 여겨서 버리고 싶다. 풍성한 감수성 덕에 같은 것을 보고도 남들 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느끼는 건 축복이다. 어렸을 적엔 딱히 내세울 것 없고, 남자 치곤 예민해서 그저 '넌 너무 감정적이야' 라는 말로 퉁쳐짐을 받았던 녀석이, 나이 먹으니 감성지수니 공감능력이니 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 감사하다. 덕에 별도의 공감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 각종 sns에 올라온 3분 남짓의 감동적인 편집 영상, <인간극장>이나 <동행> 등의 관찰 다큐, 오은영 박사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나 <금쪽 같은 내새끼> 등은 볼 때마다 자동 감정 이입이 되어 늘 휴지를 준비해야만 한다. 


나에게 감정이란 '쉽게' 올라가는 게임 레벨이 아니라,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빠르게' 전달되기 때문에, 공감을 잘 하는 것으로 보여 좋을 것 같지만, 실은, 뭘 해도 마음이 '쉽게' 힘들어져 '어렵게' 일을 치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예 그런 프로그램 자체를 안 보고 싶기도 했다. 보면 빤히 눈시울 붉어져 혼자 몇 번이고 팽팽거리며 코를 풀게 분명해서 힘을 빼고 싶지 않다며 지레 김칫국을 마시곤 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직장 폭언으로 비롯된, 제어를 벗어난 감정이었다. 그 전까진 열정으로 가득찼다. 일과 시간 중엔 종일이다 싶을 정도로 사무실 내 동료는 물론, 유럽내 열 두 국가의 파트너들과 동시다발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갖고 일을 추진하며 활력 속에 에너자이저로 살았다. 그랬던 나는 한 점 남김 없이 사라지고, 오늘은 또 무슨 쌍욕을 처먹을까, 무슨 개망신을 당할까에 두렵고 무서워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평일의 연장선인 토요일을 보내고, 그러다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오후는 불안이 극도로 치달았다. 일요일 예배의 마침을 알리는 강대상 위에서 목사가 땡 하며 내리치는 종소리는 귀에 못을 박듯 잔인하게 내리 꽂혔다. 그 종소리는 즉시로 심박동수를 미친듯이 펌핑시켜서, 심장박동에 몸 전체가 쿵쿵쿵 뛰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나는 그 놈의 종을 박살이 나게 던져 버리고 싶은 정신 나간 생각이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맞다, 그 당시의 나는 우울증, 트라우마, 대인기피증의 환자였다.


자격지심과 자책으로 마음이 문드러져서 그 어떤 말로도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풍부한 감수성 덕에 그래도 잿빛 구름이 껴안고 있을 비를 보며, 그 빗물이 마른 대지의 식물에 생명수가 될 것까지 확장하며 긍정적으로 내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훼손되면, 찬란한 햇살을 볼 때, 남들 다 좋다는 스페인의 그 햇볕 아래에서 맘껏 일광욕을 즐기는 그 때에, 망가져 버린 내 삶은 극명하게 반대의 입장이 되어, 이글거리는 햇볕은 더 없이 무섭고 공포로 다가왔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이겠느냐 마는, 정말 그랬다. 사진 찍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일수록, 즐기지도 못하고 즐길 수도 없는, 상사의 폭언 화살에 온 몸이 꽂혀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매니저로 발탁되며 스카웃 제의를 받고 야무진 결심을 하고 왔지만, 내부 공사 중 4층에서 떨어진 창유리 마냥 다시 주워 붙일 수도 없게 깨져 버린 나는, 영영 재기불능의 불구가 된 것 같았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상처가 될 뿐이었다. 직장 생활이 원래 그런 건데 내 성격이 문제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는 식의 넘겨짚는 말부터, 그런 일이 자기 가정엔 없어서 다행이라는 무심한 말까지.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소스라치게 놀랄 사람들이, 남의 일이니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다. 


상담전문가도, 심리상담자도 아닌 그저 내가 해외 생활 좀 해봐서 아는데, 내가 사람들 좀 만나봐서 아는데 하며, 척 병에 걸린 사람을 비롯해 남의 인생을 함부로 안주 삼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덕분에 냉혹한 현실에 비로소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입은 건 타박상 정도가 아니라 연쇄 추돌사고 급인데, 영혼의 안식을 바라던 곳에서는 혼절한 자에게 자동심장충격기도 아닌 각종 교통법규와 다른 사고사례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된 것은 너무도 역설적이게도 욕을 일삼던 상사가 정리하는 게 서로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입사도 아닌 해고가 이렇게도 바라던 일이 될 수 있다니? 매일 머리에 얹고 있어 목뼈가 부서질 것 같았던 몇 광주리 치의 짐이 벗겨졌다. 이어 그간 인신공격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본인도 알고 있었구나. 그 날 나는 스페인 온 이래 처음으로 웃었다. 




감정은 좋고 나쁨이 없다고 배웠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다고 했다. 감정은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이자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무너뜨리는 감정은 자각하고, 가만 내려놓고 싶다. 

인에게 받은 상처, 감정을 년이 지나도록 환절기면 찾아오는 감기 마냥 달고 살던 이걸 이제는 벗어 던진다. 

인간의 탈을 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다운 인간, 성숙한 아름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 나쁜 감정을 버리는 연습을 오늘도 한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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