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요? 평소에는 정당과 정치성향을 따져가며 맞네 그르네 할지언정, 한 나라의 대표자가 온다는 건 모든 걸 멈추게 합니다. 왜냐하면 스페인에 있는 저는 대한민국의 시민이지 빨강이냐 파랑이냐가 (그 외 녹색, 노랑, 회색 등) 아니니까요.
저는 남자라 시집살이할 일이 없지만,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친정 가면 그전까지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든 안 좋았든, 집이 넓든 좁든, 밥이 맛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냥 마음 푸근해지고 부모님 품에 마구 안겨가며 자기가 키우는 아이 마냥 펑펑 울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 있잖아요.
여자가 아닌데도 제가 이렇게까지 느낌을 떠올려 보는 건, 순전히 브런치 작가님들의 공일 겁니다. 하도 시집살이에 대한 작가님들의 이야기가 추천글에 많이 올라오니 (이유가 뭘까요 대체? 작가님들의 성비율 상 여성분들이 많으셔서 일까요?) 자연스레 물들어 갔는가 봅니다.
여하간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일이 있는데 하겠느냐고.
아니, 영원할 줄 알았던 천직에서 손을 놓은 지 15개월이나 된 마당에 제가 뭘 가리겠어요. (이러면서 실은 무슨 일인데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얼마인데요 하며 미주알고주알 다 가리는 극세사 미모사 나노테크 팔랑귀 라는 건 안비밀로 할께요.)
하지만 일단은 잘 알고 지내는 분에게서 연락 온 데다 (저도 그렇지만 그분 역시) 절실히 일할 사람을 찾는 듯하여 하겠다 하고, 얘기를 들어보자 했지요. 세상에... 그분께서 오시는 일과 관련이 있다 해서요. 부담 한가득이지만, 두말 않고 하겠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날 다른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왜 살다 보면 그런 일 있죠. 없을 땐 하나도 없다가 뭐 하나 일 시작되는가 싶으면 우르르 밀려 들어오는 일. 애 셋 있는 집에서 조용할 땐 다 조용하다가 누구 하나 목소리 커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집안 전체 데시벨이 올라가는 일이요. 이럴 땐 언놈부터 잡아야 하나 하는 것처럼, 아, 너무 격했네요, 죄송합니다.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것처럼요.
일정이 겹쳐서 아쉽지만 안 된다 했어요. 그랬더니 이틀 후 아침에 다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당일부터 해 줄 수 있냐 하길래, 중복되는 날이 있으니 일정을 조정해 준다면 할 수 있다 했지요. 그렇게 해서 저는 문 대통령께서 오시기 사흘 전부터 해서 마드리드에서 나흘간, 바르셀로나에서 이틀간 일을 하게 됐습니다.
15개월 만의 일인데, 대통령의 국빈방문, 고위급 인사 수행, 그리고 대통령 전용기의 동초 차량으로 쓰일 SUV 차량을 직접 몰고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500km가 넘는 거리를 새벽부터 일어나 가는 일이라니. 아휴...
네, 맞습니다. 그놈의 배탈이 또 났어요. 이젠 배탈이나 몸살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네요. 뭔가 평범했던 일상에서 달라지고, 그전까지의 리듬이 깨지는데 몸에서 이상신호가 없으면 오히려 잘못된 거 아니겠어요. (극한의 긍정적인 자세)
그렇게 엿새간 떨림 속에 일을 하고 나니, 배탈로 시작한 15개월 만의 현장 업무, 체중감소로 마쳤네요. 수면제 과다복용이라도 한 듯 한참 잠을 잔 건 덤이고요. 회장님이시다. 영부인이시다아. 대통령님이시다아아아. 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하고 직접 대면하거나 악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분위기상 흥분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라 그랬는지 그만큼의 업무 후 무기력감도 후폭풍처럼 몰아쳐 왔어요.
손 안 씻어도 좋으니 오스트리아 교민들처럼 주먹 인사라도 했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람에서요. 결국 일 마친 다음 날, 꿈에서라도 그분과 격한 포옹을 이뤘지만, 꿈은 깨면 끝이잖아요. 더 허탈해지지요. 여하간 멀리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그 일이 뭐라고, 실제로는 얼굴도 볼 수 없으면서 말이죠. 그분을 보고 싶다면 그냥 청와대, KTV, 스페인 교민 분들의 유튜브에서 보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아니면 길게 늘어선 인파 속에 있는 편이 더 좋을듯 싶어요.
일하는 중엔 온통 신경이 거기에 몰려 있어서, 일이 끝나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무기력해져서, 그런 핑계 아닌 핑계 속에, 그렇게나 좋아하는 글쓰기마저도 일주일이 넘게 접어 두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성 가득 담긴 댓글에 간단한 답글 조차도 도저히 손이 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하필 타이밍도 꼭) 제 글 중에 하나가 [다음] 어디에 올라온 건지 주말 이틀간 조회수가 만 건씩, 합쳐 2만 건이 나왔습니다. 전에 여행글에서 2천, 일상글에서 2천 정도 나온 적이 있는데, 2만이라니. 그런데 조회수 대비 좋아요, 댓글, 구독자가 늘지 않는 거 보면서 반성 많이 했어요.
제 딴에는 '아니, 매거진 정해 놓고 쓰고 있는 다른 (좋은) 글들도 많은데, 왜 하필 어느 매거진에도 들어가지 않은 글을 골라서, 이전 글에서는 전혀 생뚱맞은 주제로 넘어가게 만든 거니?' 라며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보지도 듣지도 못할 알고리즘에 했더랬어요. 결국 얻은 답은, '그러길래 평소에 잘 쓰고, 잘 관리했어야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 그래서 더욱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당당한 변명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러더니 이번엔 라디오 뉴스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대통령님이 주고 간 선물인가 봐요. 그런데 이왕이면 감동으로만 끝날 선물이면 좋겠는데, 뭔가 받기 위해 능력을 최대한치로 써야 하는 희한한 선물을 주셨네요. (또 배탈이 날까요? 어휴 정말...) 그냥 이번 우리나라 대통령의 스페인 국빈 방문 소감이 어땠나요,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썰 좀 한번 풀어봐요 이 정도면 좋겠는데, 영어로 하랍니다. 심지어 1분 자기소개도 아닌 10분을요. 왓더...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인데 어쩌다 스페인어도, 한국어도 아닌 영어를 하게 되었을까요?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아리랑 Arirang 뉴스라서요. 지금 머리를 한창 싸매고 있어요. 대통령님과 꿈에서 허그하면 이런 일이 생기는가 봐요. 앞으론 저지선을 뚫고서라도 꼭 현장에서 만나야겠어요.
예전에 4월의 인사이트 나이트, 인문학 세계여행 강연 당시 제 소개를 전공은 프랑스어, 강의는 영어, 취미는 외국어라며 여기서 사용하는 필명 그대로 스페인 한량이라 했는데, 바꿔야 할 듯 싶어요. 근데 뭘로 바꾸죠? 제가 잘 쓰는 감탄사 아휴로 할까요? 아휴, 雅休(맑은 쉼)? 오늘 죄송합니다만 몇 번을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인터뷰가 바로 내일이에요. 아, 한국에선 이미 오늘이라고 해야겠네요. 6월 25일 금요일 한국시간 오후 6시 40분, 스페인 오전 11시 40분입니다.
인터뷰가 끝나면 다음 날 6월 26일 토요일 오후 7시 영감 폭발 축제의 현장인 명강의, 인사이트 나이트가 기다리고 있어요. 전 이번에 사회를 맡았습니다. 당일 조금이라도 덜 떨려 보고자, 뭐라도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팀라이트 작가님들과 리허설 후 랜선 라이브 투어를 진행해 봤어요. 짧았지만, 떨림이고 뭐고, 가이드가 천직임을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15개월 만의 일 복귀를 시작으로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줄도 안 서고, 스트레칭도 없이 바로 T-Express 롤러코스터 제일 앞자리에 타라며 돌아볼 틈도 없이 푸쉬를 받은 이 느낌.
몸은 힘들지만 목청으로는 이미 너무 신나서 꺄악 비명을 지르다 못해 벌써 쉬어버린 이 두근거림을 어찌 전해야 할까요. 뭐라 말로 다 할 수가 없는데요. 그렇다고 여러분들께서 굳이 저처럼 15개월을 쉬어 보실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꺅꺅 거리는 정글의 원숭이가 되는 한이 있더래도, 방정맞은 그 외침 속에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 가득한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함께 가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