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15일에서 20일은 집주인에게 월세 송금하는 날입니다. 응? 그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집 한 채 없다고? 체면 안 서지만, 네, 여즉 월세로 삽니다.
00만 아니었으면 하는 식의 변명만큼 구질구질한 것도 없지만, 민망하게도 그 핑계를 대야겠네요. 이눔의 코로나... 대체 얼마나 더 잡으려고 하는거니. 이젠 그만 놓아줄 때도 되었건만. 투정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은 편리함, 편의성 등을 추구하는 성향이 덜해요. 아니, 이때껏 하던 대로 하고 살아도 그닥 문제가 안 되는데, 왜 꼭 고치려드우? 그게 더 힘든거라우. 대체적으로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사회문화 시각도 요즘 시대엔 별로 맞지 않는 거 같아요. 당장 유튜브만 보더라도 한국의 편리함과 처리속도의 신세계에 눈 뜬 젊은 외국인의 경험담과 칭찬 영상이 엄청나니까요.
유럽에선 아직 한국을 가본 분 보다 가보지 못한 분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전 생활을 불편하다고 못 느끼는 듯합니다. 스마트폰 쓰기 전까진 '전화기는 전화만 잘 됐음 충분하지, 굳이 스마트폰을 써야 돼?' 하다가 지금 와서는 '와, 이전엔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코로나 이전에는 은행 앱으로 바로 보냈죠.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이 자동이체 설정으로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요. 작년부터는 무통장입금으로 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수취인의 은행에서만 무통장입금이 가능해요. 내 거래은행이 A이고, 집주인이 B라면, A 은행 ATM기기에서는 안 되고 B 은행 기기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이게 일단은 좀 귀찮은 일이고요.
ATM 기기에서 처리할 때 사용 가능한 지폐는 100유로 까지에요. 200유로와 500유로는 처리가 안 돼요. 일반 상점이나 식당에서도 200유로와 500유로는 잘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계산대에 해당 지폐는 받지 않는다고 공지해 놓기도 해요. 손님인 내가 매장 물건 사고 돈 쓰고 싶다는데 안 받는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요?
일단 지폐 자체가 고액권인 데다가 (한화로 27만원, 67.5만원), 경우에 따라서는 상점이나 식당에서 나중에 은행에 입금할 때 지폐의 출처를 증빙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심지어 고액권 입금 처리 시 수수료를 낸다 하니까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럴 거면 대체 처음부터 왜 발행해서 유통을 시키는 걸까요? 모쪼록, 유럽에 오고자 환전할 때는 200유로와 500유로 지폐를 가급적 피하기 바랍니다. 아, 아무 말 않고 받아주는 매장도 물론 있습니다. 고가의 명품 부티크와 백화점이요.
앞서 언급했듯, 해당 은행까지 가야 하는 일부터가 신경 쓰입니다. 왜냐하면 이곳 ATM 기기는 우리나라처럼 은행 안에 있기보다는 거리에 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한민국처럼 치안이 안전한 곳이 없다는 얘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뒤집어 말하면 대한민국 밖은 그만큼의 수준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쉬운 점이지요. 그러니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달엔 그마저도 처리가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하필 기기에서 처리가 안 되는 지폐만 있어서요. (실제로 기계에 넣어보면 다시 내뱉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주인의 거래은행 지점으로 방문합니다. 이번 달 15일은 금요일이었어요. 평소에도 15일 첫날에 입금하지만, 이번엔 특히나 주말 동안 마음 편히 보내기 위해 일찌감치 갔습니다.
헉,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함정이 있었습니다. 은행 고객과 비고객이 이용하는 날짜와 시간이 달라요. 아래 사진을 한번 보시겠어요.
고지서 납부 처리
은행 이용 고객 / 월 - 금 8:30-11:00
은행 비이용 고객 / 화, 목 8:30-10:30
은행 근무 시간 / 월 - 금 8:30-14:00
(고객이든 고객이 아니든 상대하는 시간이 최대 두 시간 반 밖에 안 된다니! 우리나라도 이런가요?)
허탕을 치고 갔습니다. 토, 일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동일 은행의 다른 지점을 가 봤어요. 은행 지점별로 운영 시간이 다른 경우도 있거든요. 엇, 그런데 시간은 다르지만 운영 날짜가 동일합니다. 또 허탕을 쳤네요. 심지어 비고객은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가 아니라 화요일과 목요일 딱 두 번뿐이고, 시간도 두 시간뿐입니다.
하긴 고객이라 해도 30분 차이(옛다 시간 인심). 그러면서 본인들 영업시간은 오후 2시까지라 합니다. 여기 스페인은 오후 2시부터가 점심시간인데, 여긴 아예 점심 전까지만 하고 끝나는군요. 헐.
드디어 화요일입니다. 어느새 월세 납금 마지막 날짜인 20일이에요. 삼고초려도 아니고, 세 번만에 은행 방문 성사라니. 올레, 만세라도 불러야 할까요. 아래 사진 한 번 보시죠.
앞짐, 뒷짐. 먼산. 다리꼬기. 줄서기도 개성 넘치는 스페인.
어머나 세상에, 치즈도 아니고, 그 많던 창구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단 하나만 있군요. 1명은 처리 중이고, 6명이 대기 중인데, 이 사진을 찍기까지 사실 3명이 더 있었습니다. 즉 제 앞에 10명이 있었던 거죠. 저는 은행 건물 밖에서 대기했어요. 그나마 일처리를 마친 세 분이 나간 덕에 이렇게 한번 남겨봤습니다. 다행히 초상권에 문제 될 분은 없네요. 헉, 시간을 보니 이런 걸로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니었어요. 10시가 넘었거든요! (갑자기 열일하는 심장)
사진에는 없지만 심지어 이 지점은 영업 시작 시간이 8:30 도 아닌 9:00 였습니다. 아휴... 그런 거였으면 밖에다 써 붙여 놔야지, 사무실 안에다 붙이면 어쩌라는 걸까요. (물론 저는 당당히 9시 30분에 왔습니다만)
7, 8월 휴가철 두 달 동안만큼은 안 그래도 적은 근무 시간, 이왕 더 티 나게 줄이자는 이 은행. 근무조건이 너무나도 마음에 드네요.
이러다 시간 놓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듭니다. 9시와 9시 1분은 다르다는 게 여기 사람들의 기본 세팅이거든요. 어제 제가 스페인의 비즈니스 세계의 단면을 말씀드렸지요. 우리나라에선 <고객은 왕이다>로 갑질의 폐해가 있다면, 여기는 정반대로 직원 중심입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듯, 당신은 (하고 많은 영업점 중) 내게 왔으니 내 말을 들어라 이런 거지요. 손님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젊은층은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를 넘기며 시간을 보내지만, 어르신들께선 기다리면서 서로 뭐라뭐라 하십니다. (어휴 이눔의 은행, 또 기다리네... 분명 이러셨을거에요. 안 봐도 비디오.) 제발이지 이 양 극단에서 중간 합의점 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아무리 기다렸다 해도 만약 시간이 10:35 이 되면 직원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심플하게 No라고 합니다. '안 됩니다'는 말 앞에 실은 다음 문장들이 생략되어 있는 셈이지요 : 자, 당신은 우리 은행 고객이 아닙니다. 현재 시간은 10시 35분이고요. 저희 은행의 고객이 아닌 분들의 이용 시간은 여기 분명히 나와 있듯 10시 30분까지 입니다. 전 할 수 없습니다. 목요일에 다시 오십시오.
우리라면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세요.' 읍소를 하든, '마! 내가 말이야, 여기 지점장이랑 상그리아도 마시고, 엉, 플라멩코도 봤어, 어!' 면서 어떻게든 비빌 구석이 있잖아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여기는 그래도 선대에 아랍 정서가 800년이니 깃든 '스페인'이라 어쩌면 될 수도 있겠네요. 열 번 시도에 두 번 정도로.
프랑스, 영국, 독일이라면 정말 5분이 아니라 1분만 넘어서도 봐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제가 지금까지 쓴 브런치 글을 모두 걸겠습니다. (어쭙잖은 시도네요)
그래도 그런 작전(?)은 여기선 안 된다는 걸 기본으로,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두口頭로 정한 것이 아니라, 활자로 분명하게 적어 놓았기 때문이죠. 아니, 세상천지에 이런 일이 말이 되느냐고! 라며 호통을 내지르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안 돼요.
이건 문화적으로 봤을 때, 민족 구성의 측면과도 관련이 있어요. 우리는 단일민족이고 단일언어권이라 '어!'라고 해도 '아!'라고 알아듣지요. 아니면 반대로 같은 단어를 여러 상황에 두루 쓰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건 우리도 자각 못한 우리만의 습관이자 관습이랍니다. 유럽은 워낙에 다민족이 뒤섞여 살아온 데다, 외국인과 비거주자도 많다 보니 통일성을 갖추기가 어렵지요. 이심전심, 우리가 남이가, 이런 정서가 통할 곳이 아니에요.
여하간, 휴대폰 시계라 째깍거리지는 않지만 껐다 켰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확인하다 마침내 제 차례가 됐습니다. 혼자서 일처리 하느라 스트레스받았을 직원에게 혹여라도 핀잔 들을까, 저는 미리 준비한 쪽지를 냉큼 건네며, 머릿속에서 연습했던 말을 다다다다 읊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 무통장 입금하려고 왔어요. 매달 밖에서 입금처리를 해 왔습니다. 여기 지난달 처리한 영수증도 한 번 보세요. 항상 하던 일인데, 이달엔 할 수가 없어서요. 보세요. 저 기기에 들어갈 지폐가 아니거든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족히 쉰은 넘었을 듯한 여사님은 저를 보시고, 쪽지를 보시고, 다시 저를 보시고, 화면을 보시고, 제 신분증 (거주증)을 달라고 하십니다. 제 이름 물어보시고, 금액 확인하시고, 수취인 이름 확인합니다. 제 이름이 스페인식이 아니다 보니 몇 글자 안 되는 걸 독수리 타법으로 치면서도 자꾸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웠다 썼다 합니다.
다시 한번 금액 확인하고, 서명하라고 합니다. 무사히 마쳤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마감 15분을 앞두고 10시 15분에 나왔습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걸 가지고 이렇게 장황하게 입에 거품 물듯 썼을까요.
쓰다 보니 학원 영어 강사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학연수 경험 한 번 없었던 저로서는 늘 공부하러 밖에 나갔다 온 분들이 부러웠어요. 그런데 잠시 공부도 아니고 아예 어렸을 때부터 호주 멜버른에서 부모님과 살고 대학까지 졸업한 분이 (굳이) 한국으로 와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들 물어봤죠. 그 좋은 호주에서 왜 오셨어요?
연예인 이본처럼 단발머리에 까만 피부, 강단 있고도 활기찬 목소리, 작은 체구지만 에너지 뿜뿜 넘치는 그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 호주요? 저처럼 빨빨 거리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들어요. 오전에 뭐했니 라고 물어보면 우체국에서 반나절, 다음날은 은행에서 반나절, 그리고 시청 가서 하루 종일 보내고, 그걸로도 처리 안 돼서 결국 친구들과 커피 한잔 하고 왔다는데. 아휴, 전 그런 곳에서 못 살아요. 전 정신 쏙 빼놓는 곳이더라도 뭐든 빨리빨리 하는 게 제 체질에 맞아요.
그러고서 믹스 커피를 원샷으로 털고, 다음 수업하러 뜀박질하듯 갔어요.
이제는 충분히 익숙해질 법도 싶은데, 여전히 저에게는 다르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불편하고 답답해서 혀를 차고 툴툴대며 구시렁 대는 삶. 어쩌면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을 지루하지 않게 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평소 이곳 주민으로 문제없이 지내다가도, 언제든 맘만 먹으면 바로 여행자의 시선과 기분으로 호기심 넘치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 보는 것으로요.
집에 와서 영수증을 사진 찍어서 제 회계사와 집주인에게 메일과 문자로 전해줬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아침은 은행 오가고 무통장입금 처리하는 것으로 아주 알차게 보냈어요. 덕분에 이 경험으로 글도 쓰고요. 다만, 오랜 타지 생활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한국 가면 원시인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듭니다. 기우杞憂 맞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