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내리기 시작해 사흘 간 마드리드 주에 지속될 강설 주의보에 대한 스페인 뉴스의 기사제목 입니다.
해가 바뀌어 햇수로 이제 9년차에 접어든 스페인 생활.
마드릿에선 눈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수 년 전, 저희 큰 아들이 이전 슬로바키아 시절 겨울이면 5개월간 실컷 보던 눈이 하도 보고 싶어 간절히 기도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보슬보슬 내린다며 아빠 얼른 나와 보라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화장실에 있던 저는 3분 만에 나왔지만, 그 3분도 채 안 돼 눈은 그치고 말아서 제 눈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눈을 보려면 마드리드 북부 과다라마 산맥까지 차를 끌고 가거나, 아님 산맥 너머에 있는 세고비아, 로소야, 라스카프리아 등의 마을을 갈 때에나 볼 수 있었습니다. 즉, 부러 찾아 다녀야만 했죠. 차를 타고 가며 눈보라를 볼 때는 좋았지만, 다시 차를 타고 올 때는 젖은 옷으로 탄 채, 행여나 산비탈길에서 사고 날까 조심조심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집까지 피곤하게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름의 재미는 있었지만요.
슬로바키아에서처럼 겨울이면 예외없이 눈이 펑펑 쏟아지듯 종일 내리고 그럼 집에서 편히 창가에 앉아 코코아나 커피 한잔을 진하게 하며 이무지치 연주의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의 따스한 선율을 감상하며 마음을 한껏 띄워보고,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보고 싶은 친구에게 카톡 메세지를 전해보는 그런 낭만은 마드릿에 사는 동안 추억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들 녀석과 같이 나가 3분만에 눈사람 하나를 뚝딱 만들 정도로 그렇게 많이 내리던 눈,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시장에서 내놓던 소나무들의 짙은 솔내음은 마드릿에 사는 동안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빛바랜 과거가 되었지요.
스페인에 사는 동안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눈을 보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이상 기온 영향으로 세기의 눈이 내리게 된다는 소식은 생일 선물을 기다리는 만큼이나 들뜨게 만드는 소식이었습니다. 일기 예보 상에는 오후 2시 정도되서 온다고 나와 있었지만, 네살배기 막내딸은 그때까지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부시시 일어나자 마자 눈을 찾았습니다. 점심 먹고나면 올거라고 알려주니 기대 보다는 실망한 기색이 대번에 얼굴을 덮습니다.
그러다 개학을 앞둔 둘째 오빠의 공부를 도와주러 방에 있던 중, 호들갑스런 엄마의 목소리가 집안 통로에 울려 퍼집니다. "눈이다 눈, 꺄악!!" 그 순간, 같은 방에 있던 둘째와 막내 모두 매트리스에서 튕겨나간 용수철이 되어 발딱 일어서서 제창을 합니다. "와, 눈이다 눈, 아빠 눈이래요!" 난리가 났습니다. 작은 방에서 옆 안방으로 옮겨와 큰 창문을 열어 제끼고 눈을 잡으려 손을 뻗습니다. 혀도 낼름 내밀어 봅니다. 오전 11시까지 본인들은 잠옷 차림인데 창피한 줄도 모릅니다. 오로지 눈 하나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중력은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조차 스페인 살면서 그처럼 포근하게 소담하게 나긋나긋 나폴나폴 내리는 눈은 처음 보았습니다. 바람이 없기에 눈은 방향을 두지 않고 골고루 마을 전체를 덮어갑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니 동영상으로 담고 싶어 영상을 촬영하다가 갑자기 생전 한 번 해 본 적 없는 인스타그램의 라이브 방송을 시도했습니다. 짧게 3분만으로 마쳤지만, 흥분은 여전히 가시질 않습니다. - 나중에 올려진 걸 다시 들어보고 본인 목소리에 오글거려 삭제할까 제법 고민했지만,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추억 삼아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곧 있으면 점심 시간인데, 엉뚱하게도 생각은 순백의 눈으로 뒤덮힌 알프스 정상에서 맛보는 컵라면이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뜨거운 물만 부어 먹는 컵라면은 안 먹어본지가 1년도 더 넘었어요. 없으면 그냥 봉지 라면 끓여서 커다란 스프컵에 담으면 되지요 뭐. 아, 아쉽게도 국물라면이 아닌 짜파게티입니다. 그래도 커다란 창가에 앉아 호로록 먹는 라면, 아니 짜파게티 덕에 다섯 식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생겼습니다.
먹는 동안 눈이 어느 정도 쌓여갑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할 정도로 제대로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 나갑니다. 평소 애들보고 아이구 우리집 강아지, 강아지 했는데, 오늘 제대로 이름값을 합니다. 사방팔방 뛰고, 소리지르고, 눈뭉치를 만들고, 뽀독뽀독 발소리 내며 눈을 밟으니,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아이 셋을 둔 아빠도 오늘 하루는 10년 전의 슬로바키아, 아니 30년도 더 전의 당산동 코흘리개로 돌아갔습니다. 눈싸움에 마스크에 눈이 들어가고, 눈사람을 만들다 신발에 물이 조금씩 스며들고, 미처 찾지 못한 장갑에 손이 빨개져 시려가는데도 나온 모두는 신이 났습니다. 눈싸움 하는 동안 산책 나온 몇몇 주민들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갑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진을 찍은 어른과 아이들의 행복에 대단한 일조를 한 것 마냥 의기양양해지고 기쁨이 솟구칩니다. 두 아들과 엄마에겐 두번째 눈이, 아빠와 딸에겐 첫번째 눈이, 누구에게나 골고루 뿌려주는 그 눈 하나만으로 행복에 물들어 가는 하루입니다. - 눈은 마침 내일과 모레까지 사흘간 계속 된다하니 1월의 첫주는 책과 친구와 눈으로 선물 주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