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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14. 2021

스페인에 눈이 오면

반세기만에 전설적인 눈이 오다

며칠 강제 휴식 기간을 가졌다. 이유는 집에서 40km 내 거리에 있는 친구집 방문이었다.


첫눈 오던 날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모두가 들떴다. 산 속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차를 끌고 가지 않아도, 눈 앞에서 창문만 열고도 눈을 마주할 수 있다니. 이 눈에 얼마나 스페인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는지 모른다. 유학생활 이제 겨우 1년 남짓한 학생은 스페인 생활 1년만에 첫눈을 본다고 했다. 나처럼 9년 정도된 교민 역시 살면서 이런 눈은 처음 본다고 했다. 반백이 넘은 스페인 현지인 조차 자기 생애 이런 눈은 처음 보는 거라 했으니 마드리드에 사는 주민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전부 평생에 처음 보는 눈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 역시 아이들과 너무도 들뜬 나머지 겁도 없이 인스타그램에서 라이브 방송도 감히 시도해 볼 정도였다.


눈이 온지 2일차이던 금요일, 1월 8일. 아내는 갑작스레 친구집에 가자고 했다. 스페인에 살던 해부터 알고 지내는 한-서 부부 가족이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세 자녀를 둔 다자녀 집안이다. 그 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이고, 우리집은 아들 둘에 딸 하나이다. 그 집의 막내와 우리집 둘째가 서로 동갑내기에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 서로 둘도 없는 친구이다 보니 양 가정을 오가며 좋은 시간을 자주 갖곤 했다. 거의 언니 동생,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어 지내왔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서로 외곽으로 이사를 가 이전처럼 걸어서 다닐 정도로 자주 만나는 형편은 안 되었으나, 방학 때면 으레 찾아가 서로 먹고 마시며 어울리는 일이 스스럼 없이 있는 사이였다. 먹고 마시는 일이기에 계획이나 준비는 당연히 양가 엄마들의 쿵짝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마침 스페인의 짧은 겨울 방학 끝인데다 눈도 오니 아이들이 만나면 서로 얼마나 재미있게 놀겠는가 라는 얘기가 나와 부랴부랴 서둘러서 집을 나가게 되었다. 보통은 식사를 하고 느지막이 가곤 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작정하고 1박을 하기로 했다. 겨울 눈썰매 캠프 마냥 아이들에게 그런 시간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다. 알고 지내온지 8년도 넘는 사이이니 어른들끼리도 부담없겠다 싶어 따라나섰다. 간단히 짐을 싼다 하지만서도 막상 챙겨보니 소형 트렁크 하나에 백팩을 챙기게 된다.


첫눈이 오고 난 다음 날이라 길가에 눈은 제법 쌓였기에 차 보다는 기차로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근교열차를 탔다. 그날따라 평소에는 잘 맞던 막내 딸의 장화가 잘 안 들어가서 하는 수 없이 운동화를 신겼는데, 신나게 눈을 헤집고 다닌 결과 열차를 타기도 전에 다 젖고 말았다.


차로 30분면 가는 거리였는, 열차 안에서만 장장 1시간 20여분을 달다. 가기 전부터 이미 에너지를 다 쓴 딸과 따땃하니 히터가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두 아들과 엄마는 달콤한 낮잠시간을 즐겼다. 알칼라는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열차는 마드리드 시내에 진입했다가 다시 서쪽 외곽으로 빠진다. 들판만 보이던 동쪽과는 달리 서쪽 기찻길은 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다. 예전에 다니던 L 회사 출퇴근 길이 떠올라 잠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내려야 할 역에서 딱 하나만 더 가면 온갖 쓴물 단물을 다 맛보던 회사가 나온다. 그게 벌써 5년도 더 된 옛 일이라니 시간이 무상하기만 하다.


기차역에 내리자 게이트 설치가 따로 없어 바로 나다. 픽업할 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그 사이 아무도 손도 안 댄 순백의 보도에서 마음껏 뛰어보고 만져본다. 그 사이 눈은 그치질 않고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 살짝 걱정 된다. 맘 놓고 1박만 하고 다음날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한국 누님과 스페인 형님의 집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다. 정원에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이라 여름에는 늘 밖에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들어가 보니 이곳은 겨울 왕국이고, 마을 전체는 아렌델이었다. 아내는 누님과 저녁식사 준비에 분주했고, 나는 피아노도 치고, 막내 책도 읽어주고, 벽난로에 땔감도 넣고, 형님과 그간의 얘기도 나눠보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족이 기차를 타고 달려가는 사이, 본인들도 막 안달루시아 시댁에서 올라온터라 정신이 없지만서도 작년 여름에 보고 오랜만에 본 기쁨은 뭐가 어떠하든 다 좋고도 좋은터라, 여기저기서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첫날 저녁은 근사하게 시댁에서 가져온 질좋은 하몽으로 스페인식 전식과 한식 본식으로 식탁을 풍성히 차렸다.




캠핑 2일차인 토요일 아침. 일어나 보니 눈의 두께가 상당하다. 실은 상당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어제 종일 본 눈은 아침에도 쉬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위 표지 사진처럼 필터처리 없이 찍은 건데도 흑백사진 같은 분위기를 풍길 정도다) 단독주택 단지인 이 마을에는 곳곳에 족히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상당한 크기의 소나무들이 있는데, 그 위로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심지어 부러진 나뭇가지도 군데군데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인데도 사방은 고요했다. 상가는 일체 없는 주택단지라 더욱 그런듯 싶었다.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제일 먼저 접한 소식은 마드리드의 모든 대중교통이 멈췄다는 거였다. 차를 가지고 퇴근 하던 사람은 아예 집에 가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차 안에 있다는 소식부터 아예 차를 두고 갔다는 얘기까지, 마드릿 시내와 주변 외곽도시를 잇는 대부분의 도로가 끊어지거나 통제된다는 뉴스에 설마하는 심정으로 기차 시간표를 확인해 보았다.


없다. 없댄다. 언제 재개될지도 모르고. 아니 그 정도 눈으로 없다니? 스페인 보다 훨씬 못한 슬로바키아에서도 이 정도 눈에는 아무 문제 없이 기차며 버스가 다닐 수 있는데? 겨우 이틀 내린 것만으로 아무 것도 못한다는게 도대체 말이야 방구야?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태양의 나라인 스페인에서 언제 이런 눈을 경험해 봤겠는가, 그러니 개인 가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시 당국에서조차 별다른 제설 장비가 없어서 우왕좌왕만 하는 형편이었다.


뉴스를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다. 다들 약속이나 한듯 같은 말을 하는게 신기했다. 거기에 전하는 시간 내내 반복이 있다 보니, 살다살다 주방 블렌더 돌리듯 쉬지도 않고 쏟아내는 스페인어 뉴스가 귀에 쏙쏙 다 들릴 정도였다. 폭설 덕에 얻은 의외의 소득이랄까.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 집에 두고 온 새, 삐꼬가 마음에 걸렸다 - 이웃분이 기르던 모란앵무새인데 고양이가 새로 들어왔다며 지난 달 갑작스레 받은 선물이었다. 아이들이 밥을 한가득 주고 왔고, 혹여 추울까봐 담요도 두르고 왔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생각은 집에 돌아가 문을 열기 직전 까지 내내 마음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마드리드는 3분 소나기 만으로도 온 시내 교통이 마비된다라는 말을 우스개 소리로 쓰곤 하는데, 단 이틀만의 강설로 시 전체는 진지궁서체로 재난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안 그래도 코로나 확진자만 하루에 만명은 기본이요 사만명 까지도 나오는 가히 한국과는 비교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폭발적인 전파속도를 가진 터라 알아서 조심하며 준 격리 상태로 지내야 했는데, 아예 강제 격리를 당한 셈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스페인 형님을 통해 전달 받은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이다 못해 이마를 짚게 만드는 갖가지 패러디물을 봤다. 그 중에 가장 황당했던 사진. 심지어 이 마드리드 지도 사진을 전해준 이는 저 아래 다섯 시간 떨어진 그라나다에 사는 친구였다. (니네 지금 이렇다며?끅끅끅)


초보부터 상급자까지, 마드리드 시내 스키 슬로프 지도


스페인에 눈이 오면, 모든 곳은 놀이터가 된다.


버스며 기차 등 모든 대중교통이 끊어져 발이 묶이고, 마트와 식품점이 문을 닫아 식품을 못 구하고 (직원들이 출근을 못하니), 개학이 일주일이나 늦춰져 애들을 집에 두어 지지고 볶에 되더라도 스페인 사람들에겐 별 문제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우리인들 이게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니? 설령 알았어도 갑자기 어디서 제설차가 팝콘 튀겨내듯 튀어나오니, 아님 우유 짜손만대면 생기니? 하늘에서 내린 때문에 이런 일 나는게 우리 잘못이니? 이건 반세기 만의 기록적인 일이야. 전설이고 레전드라고. 낸들 살면서 이런 일을 겪어 봤겠어? 아니 겪었다 해도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 한 일 하나 때문에 돈을 쓸 수 없는 일 아니야, 안 그래?어차피 며칠 지나면 다 녹게 돼 있어. 그냥 기다려도 해결될 일이야. 그 며칠 기다린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아. 걱정 노노. Don't worry!


그렇게 우리 가족은 1박 2일에서 무려 4박 5일까지 늘어난 강제 휴가를 지내다 왔다. 사흘, 나흘, 닷새. 누님은 일주일도 문제 없으니 좋다며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냐 하셨다. 정말 고맙도록 매사에 정이 넘치는 분이시다. 다행히 닷새 동안 단 한끼도 굶은 적 없다. 오히려 너무나 잘 먹어서 다들 살이 쪘다. 두 엄마에게 영양사 자격증이라도 있던거였을까. 닷새간 메뉴가 똑같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끼를 대충 넘어간 적도 없었다. 매 끼니가 정성이자 마음 그 자체였다.


또한 집 안에서 단 한 건의 온수나 난방 문제도 없었다. 뜨거운 물 잘만 나왔고, 자고 일어날 때도 항상 따뜻했다. 이 집은 가스가 아닌 우드 펠렛으로 보일러를 쓰고 난방을 공급했는데, 폭설로 펠렛 공급 업체가 오지 않아 마음 졸일 뻔한 일이 있었으나, 다행히 길이 차가 오고갈 정도로는 제설이 되어서 결국 문제 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약간의 노심초사 하긴 했으나, 지속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집 문만 열면 온 동네가 전부 놀이터였다. 남아 셋, 여아 셋, 골고루 몸이 땡기도록 놀았다. 어른도 다르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두 엄마는 낭만에 잠겨 뽀드득 뽀드득 눈길 산책을 다녀오며 소녀 감성에 취했다.


먹고 마시며 얘기하다 소재가 고갈되는 듯 싶으면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덕분에 로버트 달의 동화책들부터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과 팀 켈리의 신앙서적까지 읽으며 마음도 생각도 살찌웠다. 그런가 하면 온 가족이 다 협력해서 집 앞의 눈을 치우며 마을 전체의 공익을 위한 일에 한몫 보태어 뿌듯함을 맛보기도 했다. 얼마나 추억할 거리가 많았는지, 아예 이번 일을 계기로 두 가족만이 공유할 인터넷의 공간을 만드는데까지 갔다.




코로나 강타에 이어 전설로 남을 폭설까지.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기다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인생 중반 정도 접어들어가는 듯 싶으니 이젠 새로운 일보다는 그간 겪은 일의 반복이 더 많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번 생은 좀 더 버라이어티하게 즐겨보라는 윗분의 계획인지 정말 끝모를 일이 펼쳐진다. 코로나 기간이라고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무엇이든 자꾸 뭔가를 해보라는, 이전의 일상에 안주하지 말고 자꾸 도전해 보라며,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당신은 인생 아웃입니다 라는 식의 드러내 놓진 않지만 무언가 강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보았다. 어쩌면 보고 싶었던 그 무언가가 이번 기회를 통해 보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


뜻밖의 자연재해로 인한 강제 칩거에, 그것도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에서, 혼자도 아닌 열 명이 복닥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하루가 아닌 닷새나 되는 시간 속에서, 그래도 다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걸 배운다. 눈 맞은 강아지 마냥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무언가를 꼭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조건 겨울철 장독대 안의 김치 마냥 침잠해 있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불안함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불안에 시달려 오랜 세월 속에 자연스레 형성된 내 페이스를 놓치고 뭔지도 모를 남들 살아가는 방식에 그대로 껴맞춰 허우적 대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소리없이 온 세상을 고요함 속에 덮어버린 눈처럼 차분한 가운데 세상을 마주하고 길을 열어가고 싶다.


덧. 삐꼬는 무사히 잘 있었다. 걱정 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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