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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07. 2021

호두까기 아빠

호두 한알을 고스란히 꺼내기까지

하루 종일 호두를 깠습니다. 아이들이 저보고 호두까기 인형이랩니다. 차이코프스키 형님의 발레음악이라도 틀으면서 작업을 할껄 그랬나 봐요. 전에는 아내가 해 준 걸 먹기만 했는데 주부아빠가 되고 보니 이런 일도 나서서 하게 됩니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송이버섯 모양의 호두까기에 호두를 넣고 나사를 돌려 조이면 그 단단하던 호두는 빠각! 경쾌한 음을 내며 깨집니다. 그렇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깨고 나면 다시 두어번 더 손으로 쪼개야 합니다.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넣고 또 깨고 조심스레 속 알맹이를 꺼내어야 비로소 고소하고 기름진 맛을 볼 수 있지요.


제가 기억하는 호두 맛은 보통 씁쓸하거나 떫은데 (물론 호두과자나 호두마루는 예외죠) 이 알칼라 촌에서는 호두 마저도 신선하고 고소한 맛이 한입에 몇 개를 털어 넣게 만드네요. 아내는 손 아플테니 먹을 때만 몇 개씩 까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성질 급한 남편은 그냥 올인해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kg의 호두 한 봉지 전부를 두고 전투를 벌이듯 작업한 결과, 깨진 호두 껍질 끝에 엄지손가락 베여 아프다고 엄살 부리게 되네요. 그래도 워낙 맛이 좋아서 앞으로도 미리 손질된 호두 보다는 이렇게 단단한 호두알을 사서 깨고 꺼내며 작업을 할 거 같아요. 나름 재미가 있거든요.




호두까기는 일년 내내 주방의 후드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매번 볼 때마다 저걸 대체 언제 쓰나 했는데, 마침내 일년 중 오늘 이렇게 요긴하게 쓰네요. 일 년 중 단 한번만 쓰이더라도 제 몫을 톡톡히 해 낸 호두까기를 보며 저에게 맞는 자리는 어디일지, 저는 과연 그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해 봅니다.


호두 알을 꺼내며 아니 캐내며 처음에는 온갖 파편으로 다 부서지더니 수십개의 호두알을 손질한 끝에 한 알을 고스란히 꺼내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호두알 하나 다치지 않고 꺼내는 작업, 이게 또 뭐라고 혼자서 엄청난 만족과 뿌듯함을 느끼게 할까요.


부서진 조각에서부터 온전한 한알 그대로까지 작업하는 과정, 어렸을 적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요란스레 기합소리를 내며 보던 무술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체력도 안 되면서 무조건 가르침을 달라며 덤비지만 사부는 밀린 빨래를 할테니 어서 물부터 길어오라 시킵니다. 수백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제대로 할리 만무하지요. 그러나 무수한 반복 끝에 체력을 단련하며 하나하나 고수의 반열에 들어갑니다. 


그간의 지난한 과정은 남들은 전혀 모릅니다. 알기를 바랄 수도 없고요. 무수한 반복과 지겨운 루틴이 빚어낼 피로, 권태, 슬럼프, 매너리즘 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일의 성공여부를 떠나 본인 스스로만이 가치를 매길 수 있을 겁니다.


세계 최정상급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은 처참함이 아닌 아름다움이자 경외감 마저 들게 합니다. 그런 강수진 씨를 두고 사람들은 발레를 위해 태어난 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무수한 연습만이, 그것도 다른 경쟁자를 염두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의식하는 연습만이 지금의 자신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외근만이 일의 전부였던 제가 집콕만 하고 있는 1년 남짓의 시간, 저는 지금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 걸까요.


호두 1kg 한봉지 까다 별 생각이 다 들었네요.   


아빠가 꼬박 반나절 걸쳐 작업한 호두알들. 아이들이 맛나게 먹어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만, 다음에는 아내의 조언대로 한번에 먹을 만큼만 손질을 해야겠어요. 다음 번에도 호두 한봉지 사들고 와 호두까기 마스터 아빠가 되어 부서지지 않은 고소한 한 알 그대로 즐거이 맛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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