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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l 23. 2021

메트로놈의 추억

메트로놈과 루바토 사이에서

집에서 아들 녀석 피아노 레슨을 직접 가르친다며 글을 올린 지 석 달이 지났습니다. (이전 글은 여기에)

아들의 레슨 진도와 함께 저의 수행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학기 중에는 시험과 숙제로 피아노 연습 빼먹기 일쑤인 데다, 그나마 한번 할 때마다 서로 간에 피 말리는 신경전이 있었죠.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니, 녀석에겐 더는 피아노 연습을 거를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때가 기회라며 갑자기 진도에 열을 올리진 않았습니다. 대신 한동안 장난감과 장식용으로 자리를 차지하던 메트로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메트로놈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에야 멋모르고 시계추처럼 똑딱똑딱 거리는 게 재미있고 신기해서 자꾸 썼지요. 하지만 한순간만 방심해도 박자를 놓치고, 제 실력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내라고 부추기는 선생님과 메트로놈이 (솔직히) 미웠어요. 전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곡의 빠르기, 템포tempo를 나타내는 말은 전부터 있었지요. 익히 알듯 안단테, 라르고 등 느린 박자부터 알레그로, 비바체 등 경쾌하게 빠른 것까지.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템포를 더는 막연한 느낌적 느낌이나 감각이 아닌 수치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한 건, 네덜란드의 빈켈(1812년)과 독일의 멜첼(1816년)이었습니다. 역시나, 같은 음악을 하더라도 엄격함을 고수하는 게르만계는 달라요. 


메트로'놈'이란 어감 때문에 어렸을 때 '그건 언놈이 만든거여' 라며 농담으로 말했지만, 원뜻은 측정하다는 뜻의 <메트론metron>과 규칙, 법규라는 뜻의 <노모스nomos> 두 그리스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멜첼은 베토벤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베토벤과 그의 제자 체르니가 처음으로 메트로놈을 악보에 사용했다고 하지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분의 곡에는 메트로놈이 정말 유용합니다. 비록 스트레스는 받지만.


메트로놈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도 등장했습니다. 로스쿨 교수인 차민혁 씨가 빛을 완전히 차단한 검은색 스터디룸에 자식들을 가둬 두고 딱. 딱. 메트로놈을 울리는 장면, 정말 소름 돋았지요. (그런데 왜 꼭 클래식을 그런 식으로 쓰는 건가요, 슬퍼요) 방송 이후 메트로놈 판매가 늘었다는 소식에 놀라기도 했고, 유튜브에선 60 bpm의 메트로놈 asmr 조회수가 300만이 넘을 정도니. 멜첼이 보면 정말 좋아할 소식입니다.




둘째 녀석 역시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메트로놈 박자에 자꾸 엇갈리는 본인의 (들통난) 실력에 싫증과 짜증이 나려는 듯했습니다. 순간 제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올라서 얼른 메트로놈에 맞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저 곡의 원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정도만 파악해 보라 했어요. 느리게 시작해라, 꼭 그렇게 칠 필요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아울러 메트로놈은 연습을 위한 것이지, 음악을 만드는 건 아니라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정확한 속도도 중요하지만 너만의 감성을 잘 녹여내는 것, 그 사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음악의 본질을 이루고, 음악이 추구하는 점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얘기도 했습니다. 정말 알아듣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어요.

 



분당 몇 번의 박자를 정확한 박자와 대비되는 음악 용어가 있습니다. <루바토 Rubato>라고 해요. 흔히 박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연주하라는 말로 쓰입니다. 다시 말해, <알아서 하세요> 정도 될까요. 하지만, 이태리어로 원뜻은 다소 엉뚱하게도 <도둑맞았다> 예요. 작곡자가 원래 의도한 템포를 연주자가 훔쳤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실제 연주상에선, 마치 밀당을 하듯 자신의 감정에 따라 조금 빠르게도, 반대로 조금 느리게도 연주하라는 의미예요. 


바로크, 고전시대 음악에는 안 어울리지만, 쇼팽, 슈베르트, 슈만 등 낭만파 시대에는 잘 쓰여요. 역으로 낭만파 시대 곡을 정박으로 딱딱 맞춰 해석한다면 그야말로 어색 그 자체입니다. 다른 악기보다 특히 피아노 악곡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한창 즐겨치던 찬송가 피아노 편곡에서 루바토는 곡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어요.


루바토라고 해서 마냥 늘어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빨리빨리 가진 않습니다. 일단은 기준이 있어야 느림도 있고 빠름도 잡아가며 곡 전체 자연스러운 흐름과 조화를 만들겠죠. 기준을 잡으려면 템포를 정확하게 알아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루브를 탈 겁니다. 결국 메트로놈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친구이자 파트너인 셈이에요. 




음악과 삶은 이런 점에서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자유를 만끽하려면 역으로 적절한 제한과 규칙이 필요하잖아요. 자유롭게 노니지만 눈살 찌푸릴 일이 없고, 규칙에 얽매이진 않지만 멋들어지면서도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는 루바토.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더 부단히 노력해야 할까요. 그 내공은 언제쯤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꾸준한 연습 속에 실력을 쌓고 진정성을 담아야 청중의 마음에 카타르시스를 안길 수 있는 게 음악이지요. 글쓰기는 어떨까요. 더 나아가 한번뿐인 제 인생은요. 말뿐이 아니라 삶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가르침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일상의 루바토를 이루려면 얼마나 깊은 내공이 필요할까요. 아니, 그에 앞서 그 기본은 무엇으로 쌓을 수 있을까요.


인성 문제 있어? 하는 말이 한동안 유행이었는데, 쉬이 지치는 뜨거운 여름, 조금만 기분을 긁혀도 버럭 하며 짜증을 내는 저의 인성과 인격을 돌아봅니다. 메트로놈의 정박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채, 루바토의 자유만을 즐기려 한 것은 아닌지. 


다시금 둘째 녀석 피아노 레슨의 수행으로 돌아가 메트로놈을 보며 제 삶을 각 단계의 템포에 맞춰 봅니다. 거기에 나이가 준 나름의 눈치도 더해야겠어요. 적절한 밀당으로 루바토의 멋과 흥도 과하지 않게 넣을 겁니다. 진실함의 바탕 위에 균형을 맞춰 제 삶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글로 적으며 풀어야겠어요. 새벽에도 식지 않은 열기가 그간의 삶을 뒤돌아 보게 하는 스페인의 한여름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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