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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08. 2021

소소한 즐거움을 놓지 않으련다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인생 동기부여

얼마 전 국제적인 행사에서 한 달 같은 사흘을 보내고 돌아왔다. 130여 개국에서 천 명가량의 귀빈들이 참가한 대규모 행사였다. 택시로 10여분 거리의 집을 놔두고 호텔에서 기거하며 일정 내내 바삐 움직이더니만, 일이 끝나자마자 집에서 12시간 이상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뻗었다. 


이전 문재인 대통령의 스페인 국빈 방문 때의 일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규모가 큰 행사라 하더라도 개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사실 그리 크지 않다. 상황이 어떻든 본인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문제는 없다. 냉정하리만치 나의 문제인지 너의 문제인지를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다. 이전 대기업 직장인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퍼즐 조각이자 모자이크 파편, 기어의 톱니 그 자체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거대한 전체의 부품이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전력 질주해야 하는 '퍼즐조각썰'은 프랑스 문학과 유럽 역사의 고담준론 가운데 인권을 익힌 사회초년생에게 충격이었다. 그 썰은 사무실에서는 물론 회식 자리에서도 언급되면서 조직에서 개인의 입지에 대해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됐다.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회사에서는 그렇게 보는 게 맞다, 맞을 것이다, 맞아야 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대기업에서는.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버텨 가겠는가. 그리고 그런 조직 문화가 없었다면, 1인당 GDP에서 G7의 이탈리아를 앞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작디작은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 무늬도 없이 멀건 바탕색만으로 칠해진 퍼즐이라 해도, 그 하나가 빠져 있다면 우리는 완성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 역할과 비중이 아무리 작아 보인다 해도, 내가 없으면 그것은 절대 마스터피스 masterpiece가 되지 않는다.


고위 관리직에서 볼 때야 코웃음도 안 될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본인의 업무와 역할에 대한 작게나마 의미를 부여해야 했다. 그래야 일정한 루틴 속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맞닥 뜨려도 스스로에게 일할 동기가 생기고 어금니를 깨물며 (속으로) 악다구니를 외칠지언정 정글의 세상에서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한편, 직장인의 페르소나가 아닌 자연인인 '나'를 되새겨 본다. '나'라는 인간에게 무엇이 핵심 가치였나를 생각해 보니, '사람과의 만남'이 제일 소중했다. 그 만남은 소소한 즐거움으로 시작했고, 그 즐거움이 서로에게 차곡차곡 포인트 적립하듯 쌓아가며 이어져갔다. 


소소한 즐거움이란 게 무엇이겠는가. 어려울 게 없고 거창할 게 없다. 수다, 대화, 유머, 문자, 편지, 식사, 음악, 공연, 영화, 독서, 사색 등 일상의 널리고 널린,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이 바로 그 정체다. 대의를 바랄 것도 없고, 현학적인 이야기로 뜬구름 잡는 공허한 이야기로 낭비할 것도 없다. 


나는 그에게 들어가고 그는 나에게 온다. 융합된 공간 안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며 피부에 와닿고,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를 갖는다. 그런 만남의 첫 단계를 느슨한 연대 속 관계 relation라고 해보자. 느슨함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건, 신뢰 속에 너와 나를 X로 단단하게 묶는 conneXion (=connection)이라 할 것이다.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의 수작, <두 교황>을 보면 일상의 작은 즐거움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대화가 오고 간다. TV 드라마를 볼 때면 딴생각이 사라지고,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베네딕트 16세 교황, 교황의 말을 듣고 그런 작은 즐거움은 중요하다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두 인물의 대화와 행동 속에 잔잔한 미소를 띄워 줄 장면이 자주 나온다.


Ratzinger: It's a small pleasure.
Bergoglio: Small pleasures are important.



좀 더 살아보면 다른 결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슬로바키아에서 2~30대를 보내고 스페인에 살면서, 유, 초, 중 아이 셋을 두고, 영어강사와 대기업을 거쳐, 40대의 아재가 된 지금, 내 인생에 동기부여라는 건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내 주장이 옳다며 남들에게 강조할 생각도 일절 없다. 저마다 다른 환경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다시 돌아보니 직장생활에서 소위 잘 나가던 시절도 소소함이 낳은 결과였다. 톱니에 불과했지만 잘 관리했고, 주위를 돌보았고, 팀원을 위해 operation manual book을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신입을 위한 전자책을 발행한 셈이다. 번아웃하듯 몰입해서 작성한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일지 남기듯 상세히 적고, 수정하고, 보완하니 제법 묵직한 핸드북 하나를 만들었다. 


누구도 알아보지 않을 제일 미미한 위치였다. 그러나 소소한 것과 사소한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작지만 야무지게 다졌다. 그것이 우수 사례로 선정되어 유럽 물류 법인 전체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Best Employee 상을 받았다. 


더욱 고마운 일은 좋은 이들과의 인간관계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흘러온다는 점이다. 진심이 가져온 선물이다. 나에게 동기부여란 나를 채찍질하는 게 아니다. 순리 가운데 자연스레 오늘의 나를 만들고, 나를 넘어 너를 보게 하는 것이다. We, not Me, 즉 나 혼자가 아닌 우리로 함께 세워가는 일상 속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We not Me 내가 아닌 우리 (출처: Grace Community Fellowship)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12월의 주제는 <동기부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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