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Dec 30. 2021

스페인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II

가이드라서 말이 많은 걸까? 말이 많은 덕에 가이드 업이 잘 맞는 거라고 봐야 될 것 같다. 


사실 얘기를 잘하려면 잘 듣는 것부터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떠들다 끝나는 게 되기 때문이다. 잘 들어야 리액션도 잘 나온다. 리액션이 있어야 대화가 지속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나의 리액션이 억지라면 포커 페이스와는 담쌓은 얼굴에서 이미 5도 정도 치켜뜬 눈썹에서 신호가 전달될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반응이 부자연스럽다면, 나이에서 누적된 '촉'이 발동돼서 알아차리게 된다. 


매번 만날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 아니다. 국민 MC 유재석도 아니고, 토크계의 왕인 래리 킹도  아니다. 나도 나 좋아한다는 사람 하고나 잘 맞고 친한 거다. 아닌 사람과는 몇 년을 알아온들, 기찻길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실은, 딴에는 초반에 노력을 해 보지만, 상대방이 선을 긋는데 굳이 넘으면서 친하자고 하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인간 멍멍이라며 사람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이전의 글은 어쩌면, 아주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 멍멍이이지만, 저를 반겨주는 분만 좋아합니다.  




스페인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렵게 미팅을 잡지 않아도 된다. 대신 그만큼 시간 준수에 약한 편이기도 하다. 만나도 여럿이 떼 지어 만나는 걸 좋아한다. 화려한 파티는 아니지만, 와인 한잔, 맥주 한 캔 두고 몇 시간이고 나눌 능력치를 기본으로 탑재했다. 또래와 어울리는 건 어린 학생 때만의 일이 아니다. 나이 들수록 비슷한 연배끼리 비슷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일도 자주 본다.


봄이면 봄이니까 정원에 활짝 핀 꽃보며 커피 한 잔과 달콤한 조각 케잌을 두고 나누는 만남이 좋고, 여름이면 시원한 상그리아와 짭조름한 올리브(참고로 올리브 원조인 스페인에선 aceituna 아세이뚜나 라고 부른다)와 함께 흥을 올린다. 가을이면 누르스름하게 물든 거리를 산책하며 삶을 이야기하고, 겨울이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느냐며 서로의 한 해를 돌아보는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렇게 밖에서 얘기를 나누고 나면 집에 와서도 그 여운과 아쉬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밖에서 그렇게 얘기하고도, 헤어질 때면 못다 한 말 전화로 하자 하고, 전화 끊을 때면 "중요한 건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라며 도대체 여자의 수다는 언제 끝냐느냐며 남자들이 수선을 떠는 영상이 있었는데, 이건 정말 잘못된 얘기다.  


남자도 말 많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내가 그렇다. 


다시 말해야겠다. 한국인 중 나는 특이한 케이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스페인 남자는 그렇지 않다. 학교 선생님, 경비원, 식당 종업원, 야채 가게 주인, 버스 기사, 텔레마케터, 은행 창구 직원, 변호사, 도서관 사서, 회사 대표... 그야말로 직업과 지위에 상관없이 틈만 나면 누군가와 만나서 얘기한다. 얘기할 대상이 눈앞에 없으면 전화로라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보통 만나면 대화, 수다, 또는 그 둘이 섞인 짬뽕이 핑퐁으로 오간다. 특정 주제를 두고 배울 거리가 한가득인 대화가 있다. 지식과 지혜의 향연이다. 보통 처음 만난 분들과의 만남, 일을 통해서 만난 사이에서 겪는 일이다. 필터링을 거쳐 정돈된 내용을 나누기에 심플한 어휘라도 활용도가 남다르다. 나누고 나면 정갈한 한정식을 즐기거나, 따스한 차 한 잔의 온기가 스며드는 담백한 여운이 남는다.


특별한 주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다가 있다. 정처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수다의 소재와 주제는 맥이 없다.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끊어진다. 하지만 어색할 게 없다. 수다니까. 안부인사를 묻는 말에 식사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이들의 성적으로 빠지기도 하고, 날아든 참새를 보고서 여행 가서 겪은 에피소드가 빵 터지기도 한다. 


정신없이 오가는 수다인 듯 하지만 그러면서 그 사람을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된다. 대놓고 본인은 이런 성격의 사람이다라고 할 때도 있고, 사례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캐릭터를 읽어가기도 한다.


대화든 수다든 마음 맞는 사람과 얘기하는 자리엔 늘 공통점이 있다. 시간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휴대폰에서 아무리 새로운 메시지를 알려와도 아예 뒤집어 놓고 보지도 않는다. 알림을 아예 무음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어차피 단톡방에서 오가는 말이고, 학교 가정통신문 메일이며, 피드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러줬다는 정도의 알림이니까. 그거 하나도 안 중요해!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내 앞에 있는 그대이다. 내 앞에 있는 그에게 점점 더 매료되어 간다. 나중에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집이 좀 컸으면 싶을 때가 많다.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다. 헤어지는 게 너무나 아쉬워서. 밤새 얘기 나누고, 아예 자고 가라고 하고 싶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스페인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