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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2. 2022

스페인에도 보름달이 뜹니다

추억과 향수

창을 열어봅니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 한 달 전에도 분명 본 달인데 괜스레 더 반갑습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해발고도가 657m로 제법 높습니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고, 서울은 38m에 불과하니 상당한 차이지요.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구름이 늘 가까이 있다 느껴지는데, 이번 한가위의 달도 5층 집에서 살짝 눈길만 올려 줘도 보입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하고요. 모양은 또 얼마나 동그란지요. 스스로의 빛이 아닌 태양의 빛을 반사한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있어도, 보는 마음은 그저 밝은 빛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차 명절 인사 전화를 드리니, 보고 싶어도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못 봤다며 아쉬워하시는 어머니와, 뭐 그게 대수냐 맨날 보는 달인데 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이미 15년 넘게 추석명절을 같이 못 보낸 큰아들의 마음은 그냥 웃어넘깁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 달을 그대로 전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마음마저 듭니다.




달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건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유럽에서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lunatic (미치광이, 정신 나간)이란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듯, 불길한 기운나 광기 등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큽니다.


여기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거나 말거나 그저 달을 바라보는 게 즐거운 건 다 추억 덕분입니다. 몇 시간씩 걸리는 귀성길에도 아버지는 피곤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할아버지 댁에 이를 때 즈음이면, 이미 금빛 물결 일렁이는 논에서 트랙터를 몰고 다니며 추수하시는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어린 저도 얼른 차에서 내려 <체험, 삶의 현장>처럼 두어 단씩 묶어 낫질을 해 가며 추수하는 소소한 재미를 맛보았지요.


할머니 댁에 이르면 할머니는 언제나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 "어이구 내 새끼들" 하며 귀여워하셨습니다. 똥강아지는 사방팔방 짖어대며 뛰어나와 다리를 핥았고요. 조몰락 거리며 송편을 빚으면 솔잎을 깔고 참기름을 발라 쪄 내시고, 나중에 가져오실 때면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항상 이것저것 많았습니다.




추석빔이라며 고운 한복을 입고, 할아버지의 왕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2층 옥상을 뛰어다녔습니다. 옥상에서 추수가 아직 안 된 논을 할아버지께선 내려다보시며, 어디가 어디인지를 설명하셨고, 그러면 늘 손주들을 뿌듯하게 바라보셨지요. 그런 할아버지 옆에서 손주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며 재롱을 떨었습니다.


낮에는 쏴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다 익은 벼이삭은 황금빛을 털어냈습니다. 밤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환하게 빛을 내는 달빛에 감동하기도 했지요. 가로등이 군데군데 꺼져 있어도 별로 두렵지 않았습니다. 보름달은 그렇게나 고마운 존재였어요. 나중에는 제 생일이 음력 추석이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추석은 언제나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까불대며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 섰던 철없던 아이의 모습에서 이미 삼십 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 댁에 더는 가보지도 않았지요. 나와 살다 보니 시골을 못 찾아가 본 지도 이미 십수 년입니다. 심지어 한창 일하는 중엔 추석이나 한가위에 대한 생각마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 챙기는 사람이 있어 저 역시 고마움에 답인사를 전하고, 얼른 다른 분들께 시간 닿는 대로 연락을 드립니다.




더는 추석이라 하여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벼이삭을 보지 못합니다. 마을 앞산에 올라 가지가 꺾어질 듯 주렁주렁 달린 감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장대만 툭 치면 후드득 거리며 떨어지는 밤송이를 줍는 것도 아닙니다. 울긋불긋 곱디고운 단풍물 손짓으로 야단스레 부르지 않고, 그저 황갈색으로 누렇게 물들어 가며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우수에 젖어보는 스페인의 가을입니다.


환하디 환한 달을 보는 건 소중한 기억 속 추억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환하게 떠올리는 일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일가친척 어르신들, 그리고 그냥 모여있기만 해도 신났던 사촌들. 여기저기서 시골 똥개들이 컹컹 짖고, 손에는 담배 한 보루씩 사들고 아버지를 따라 인사하러 다니면, "오메, 자네 왔능가. 어따 그놈 보소. 솔찬히 컸네잉." 하시며 칼칼한 목소리로 정겹게 맞아주시던 어르신들.


백 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이라는 뉴스의 소식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다 눈가에 손이 가고 콧등을 훔칩니다. 바로 옆 공터 아름드리 나무를 스쳐가는 바람에 잎들이 쉬지 않고 바스락거립니다. 고요한 시간, 자연만이 빚어내는 소리에 눈을 감으니,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시던 정겨운 시골길로 바람이 데려갑니다.



photo by karkowski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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