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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4. 2022

스페인에서 피트니스 센터 정기권을 끊었습니다

아내의 소원 성취

그새 또 살 빠지셨어요?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밥은 잘 먹고 다니니?

...


4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듣는 소리. 말랐다. 빠졌다. 괜찮냐. 왜 그러냐. (네, 뭐라고요?) 

쪘으면 쪘다고 오늘부터 당장 다이어트 시작해야 된다며 난리이듯, 마르면 말랐다며 또 법석을 떠는 게 정 넘치는 한국인의 국룰인듯 싶다. 나중에 살아보니 알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페인에서도 좀 친하다 싶으면 슬쩍 건네본다는 것을.


주위 분들의 넘치는 관심으로 대신 드셔 주신 덕에 애당초 살이 찔래야 찔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마른 체질이다. 체질이 딱히 문제가 될 건 없다. 게다가 마르게만 보일 뿐, 실은 정상체중이다. 그럼에도 만나는 분들마다 첫마디는 매번 꽝을 보는 로또 마냥 변함이 없다.


그나마 군 복무 시절엔 규칙적인 식사시간과 나름의 운동 덕에 건장한 체격을 유지했는데, 제대하고 나니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역 시점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몸무게도 몸 체형도 변한 게 없는데 (물론 +/- 1kg 차이는 있다) 만나는 이들은 한결같이 전보다 더 말랐다거나 빠졌다고 한다. 그분들 말씀처럼 만날 때마다 빠졌으면 진즉에 파스스 불면 날아갈 가루가 됐을 운명이다.


평생에 걸쳐 말랐다는 말을 들으며 스트레스받는 본인 못지않게, 십 년 넘게 지켜본 아내도 적잖이 힘겨웠는가 보다. 아내는 연예할 때부터 운동해야 된다는 걸 뻐꾸기시계가 되어 지치지 않고 알려주었는데 서로가 지치는 일이었다. 운동하자, 운동해야지, 운동 좀 해요, 아 쫌... 


실은 아내도 마른 편인데, 마른 남편 때문에 아이를 셋이나 낳았어도 찔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강제 다이어트를 한 셈이다. 스페인 교회를 가면 막내 임신 때부터 지켜본 현지 여성 교우들은 나와 아내를 보면서 매번 감탄과 탄식을 동시에 내뱉기도 한다. 어느 나라든 엄마가 되면, 오직 자식 건강에 대한 염려만 있는가 보다. 




우리 집에선  암묵적 금기 용어가 있는데, 남편인 내겐 '운동'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더 피부에 와닿게 말하자면, 운동해라가 되겠다. 잘 지내다가도 운동 좀 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말에는 순간 욱하기도 한다. 나이 들수록 운동 필요하다는 거 몰라서 안 하겠는가. 시간이 없다며 핑계를 대지만, 속으론 찔린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쓰자면, 팔 굽혀 펴기 서른 개 하는데 1분이 걸리겠나, 3분이 걸리겠나. 시간이 없어 안 한다는 건 시간 있어도 안 하겠다는 말과 별다르지 않다. 안 해도 살만 하니까 안 하는 거다. 그거 안 해도 다른 데서 재미를 찾는 게 많으니 안 하는 거다. 


운동만 그러겠는가. 독서, 공부, 연락 어떤 것이든 종목은 다양하지만 이유는 비슷하다. 절박하지 않아서다. 안 하고 살아도 일상에 별다른 지장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알았다'며 얼른 뒷말을 막아 보지만, 결국에는 대충 뭉개고 넘어간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에 준하는 건수가 등장했다. 피트니스 센터의 대대적인 프로모션! 물론 이전에 없었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브런치에 매일 글 쓰려고 용쓰는 것보다 더 꾸준히 전단지는 꽂혀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도 어떻게든 회원을 유치하기 위해 어마 무시한 가격 공세로 우편함을 공략했다. 다만 보이는 족족 분리수거통으로 넣었을 뿐이다.


모르는 이에게 받는 수백 장의 전단지보다 아는 이의 말 한마디가 더 힘이 있는 법이다. 개울 건너 사는 세 딸의 엄마이자 아내의 친구가 알려준 5인 가족 월 정기권 가격. 인당 1만 5천 원 선에서 해결이 되다니. 서울 최저가 평균 2만 원 보다도 안 되는 가격. 이런데도 운동하지 않는다면, 하아... 관두자, 상종을 말아야지.




아내가 건강을 추구하는 이유는 확고하다. 가진 게 오로지 몸뚱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건강을 잃으면 집이고, 차고, 명품이고, 여행이고, 전부 아무 소용없다. (쓸수록 죄인이 되는 느낌은 무엇일까.)


12시간 연장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 때문에 까페 데이트를 하겠다던 어제 글의 다짐은 결국 쨍한 스페인의 햇볕 속에 무산되었다. (뭡니까 이게, 스페인 일기예보 직원 여러분, 너무들 하십니다) 


분위기 있는 커피 한잔보다 건강한 남편을 바라던 아내는 본격적으로 남편의 몸무게 불리기 (aka 근육 키우기) 프로젝트로 방향을 틀어, 다섯 식구 신분증을 챙겨 들고 문의, 접수, 등록 모든 걸 삽시간에 마쳤다. 집까지 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은데, 아내는 오는 내내 희희낙락이고, 나는 며칠간 볼 일을 못 봐 끙끙 앓는 죽상이었다 (차마 팔려가는 소라고는 못 쓰겠다). 아무래도 아내는 김칫국을 너무 과하게 마신 듯싶은데. 스페인이니 김칫국이 아니라 상그리아라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아내의 얼굴에 가득 찬 활기, 진심으로 좋아하며 활짝 웃는 모습은 평생 즐겨찾기 파일로 저장될 것 같다. 그 어떤 선물을 받을 때 보다도 비교가 안 되게 좋아하던 모습. 세상에 자기보다 상대를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 결혼하길 정말 잘했다.



사진: 앞으로 다닐 피트니스 클럽 내부. (하아... 안 돼, 한숨 쉬지 마)


참고. 비오는 날 까페 데이트를 다짐한다는 게 대체 무엇? 궁금하다면 아래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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