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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5. 2022

브런치를 읽어드립니다

제 아내에게

아내는 책을 좋아한다. 아이 셋을 낳고도 소녀 감성이 말랑말랑 남아 있어 문학 장르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빨강머리 앤>을 가장 아낀다. 책으로 읽고, dvd로 보고, 유튜브에 저장하고, 관련 물건도 수시로 찾아본다. 


하지만 아내에게 커피 한 잔과 함께 책 페이지를 넘길 여유는 흔치 않다. 아이 셋, 거기에 큰 아들인 남편까지 돌보는 육아와 가사부터, 해외에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상담사처럼 고민을 들어주고 응대해 주는 일까지. 아내의 하루는 오늘도 빈 틈이 없다. 그 틈새조차 마사지 기계에 목, 어깨, 종아리를 맡겨 로테이션하며 밀린 잠을 자기에도 부족하다.


바쁜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뜨개질을 시작했다. 핀란드 선수도 아닌데, 갑자기 웬 뜨개질인가 하여 물으니, 양손에 코바늘 잡고 두툼한 털뭉치로 뜨개질을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뜨개질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어 행복하다 했다. 또한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에, 뜨개질을 하면서 유튜브로 뭐든 보고 들을 수 있고, 그 덕에 시간을 보다 알차게 보내는 기분이 들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 아내는 혼자서 하는 걸 싫어한다. 통마늘을 까더라도 꼭 나를 부르고, 깨를 볶더라도 나를 옆에 앉히며, 지금처럼 글을 쓰더라도 이왕이면 자기 옆에서 하고 있기를 원한다. 애를 둘러업고 책장 정리하다가 전화 오면 바로 받고, 그러면서 막내 기저귀도 갈고, 동시에 큰 애도 얼러주는, 나와는 비교 불가한 고퀄의 멀티태스커인 아내이지만, 정작 다재다능한 아내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며 빈둥거리더라도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 




문득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어졌다. 평소에도 막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졸랐다. 귀찮아하면서도 하다 보니, 어느새 구연동화 선생님처럼 생동감을 살리고, 추임새도 알아서 넣어가며 자연스레 읽어주는 게 습관이 됐다. 


이전에도 뉴스, 칼럼 등을 읽다 나누고 싶은 게 있으면 짤막하게 읽어주고 대화를 나눴다. 읽어줄 때는 분명 '해외 생활 중에 알아두면 좋지' 하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한숨 나오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아는 게 병이라더니 정말 그런가, 차라리 눈 감고, 귀 막고 사는 게 정신건강상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알게 된 브런치 작가의 글을 맛깔나게 낭독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이책과 전자책도 좋지만, 분량상 낭독으로 이어가기에는 부담이 컸다. 한 번 맘 잡고 읽어주더라도 끝까지 끌고 나가기가 어려웠다. 창피하지만 하나 더 보태자면, 사정상 며칠 쉬었다 이어 읽을 때, "어? 그 전 이야기가 뭐였더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라마와 영화 속 영상은 그리 잘 기억하는데, 활자로 읽은 책은 읽으면서 지우개로 지우기라고 한 건가... 


브런치는 글 하나가 독립된 주제와 테마를 담고 있어, 한 편만으로도 두고두고 나눌 얘기 거리가 풍성했다. 매거진이든 브런치북이든 종이책과 다를 게 없었다. 특히나 따라가고 싶은 문체의 글, 읽으면 따뜻해지는 글, 위트와 유머가 잘 버무려진 글, 깊이 사색하게 만드는 글 등 일반인이 쓰는 세상 모든 이야기가 나와 아내에게는 읽다 보면 라디오를 듣는 기분이었다.


호스트와 게스트, 진행자와 청취자가 되어 서로 작가의 감정을 느껴보고 공감하며 껴안아 보곤 한다. 감정이입이 깊이 들어가는 경우엔 몇 줄, 몇 문단을 정신없이 읽어 치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읽는 나나 듣는 아내나 '아이고, 어쩌냐 정말', '세상에, 어떡해'를 연발하며 혀를 차곤 한다. 기가 막힌 표현, 찰떡같은 비유, 완벽한 계산 앞뒤가 딱딱 맞는 대구, 수사 기법의 언어유희와 기술 앞에서는 "이 작가님, 미쳤네, 미쳤어" 하며 탄복하고 서로 쌍따봉을 치켜든다.




아내에게 읽어주는 브런치는 나만의 오디오북이자 북콘서트다. 낭독하며 함께 사색하고 반성하고 적용하며 일상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된다. 소리 내서 낭독하면 낭독할수록 작가의 유려한 서사 전개와 세밀한 오감 묘사가 대상과 더욱 밀착되고 실감의 단계가 높아진다. 대면 한번 못했음에도 바로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 같은 친근감 있는 말투 덕에 전개는 힘을 얻는다. 그 모든 게 흡입력이 있어 희열과 감동으로 우리 부부의 심장을 두드린다. 


'오늘도 고된 직장 터전과 무한 반복의 육아와 살림 현장에서, 이분들은 밤잠 설쳐가며 진을 쏟아 값진 진주를 만들어내셨구나!' 진정성 어린 문장을 접하면, 그분 곁으로 찾아가 그저 같이 있어 주거나, 토닥이거나 안아 드리고 싶어 진다. 글을 읽는 중간중간 아내와 그간 지나오며 비슷하게 겪었던 경험과 당시의 감정을 나누다 보면, '우리는 우주 안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해!' 하며 확신이 들고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도 변함없이 수많은 고민 끝에 양질의 글을 쓰고 발행하는 브런치 작가님들께 아내를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photo by vika strawberrika,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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