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인생인지도
글을 쓰면 본문부터 쓰고 여기에 어울리는 제목을 짓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제목부터 쓰고 이에 걸맞은 내용을 채워갈 때가 있다.
나는 주로 제목부터 쓰고 글을 완성해 가는 편이다. 그러나 쓰다 보면 처음에 정한 제목과는 전혀 다른 길로 빠지는 경우가 좀 있다. 아니지, 솔직해야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느낌상 열에 아홉이 그러하다. 읽어보면 3분 안에 마치는 글인데도 한 시간 안에 끝낸 경우가 없다. 3시간을 쏟아부어서(?) 고작 3분어치의 글이라니. 글 수준이 어쩌네 저쩌네 평하기 전에 본인 스스로 자괴감에 미쳐 죽을 지경이다.
일례로 어제의 글만 해도 원래 <분노의 글쓰기>로 시작했다. 말 그대로 빡치는 열받는 감정이 너무도 커서 나름 순화해서 풀어보려고 브런치를 열었던 거다. 극도로 화가 차오를 때는 그전에 미리 저장해 둔 글감들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찍소리도 못한 채 찌그러져 있다. (쓰고 보니 보관해둔 글들에 미안한 마음마저 생기는 쓸데없는 측은지심은 대체 무얼 위함인지)
분노의 감정을 험한 쌍욕 대신 투다닥 거리는 타이핑 소리 속에 풀어보려 한 거였는데, 글몸에서 분노라는 건 마그마, 드글드글 이런 식의 유치한 단어 두어 개만 겨우 끄적거렸을 뿐, 내용 자체는 제목을 엇나가도 한참을 엇나간 피아노 썰로 풀어 버리고 말았다. 가벼운 체중만큼이나 인품마저 가볍지 아니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대놓고 '나는 이렇게 진중한 사람이오'라는 식의 허세를 부리기에는 (푸흡!) 이미 그간의 글에서 간장 종지 속 양념장 마냥 찰랑거림을 유감없이 보여준 터라 민망함만 더할 따름이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더니 어휴... 마음의 소리가 아주 꽹과리를 쳐댄다.)
겨우 제목을 수정하고, 다시 본문에도 손을 좀 대어 일치성을 보여 살짝 만족스럽긴 했으나, 그럼에도 처음 의도한 대로 글을 쓰지 못함에 한숨도 나왔다. 마흔 중반의 아재가 되니 어느 정도로 염치와 수치를 일부러 모르쇠 할 정도로 뻔뻔해졌는지 그래, 뭐... 하며 발행 버튼을 눌렀다. 두터운 철판에 둘려 안 들릴 줄 알았던 양심의 소리는, (다행히도) 그 두께가 율곡과 퇴계 선생의 지폐 정도였는지, 다음날 확인한 구독 작가님들의 라이킷과 댓글에서 뚫고 나왔다.
아마도 한동안은 <분노의 글쓰기>와 같은 감정 배설에 지나지 않을 글은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날만 잔뜩 선 분노는 따뜻한 관심에 이미 풍화가 진행되고 삭아버리고 말아서. 깊은 고민도 통찰력이 있는 사유를 거치지 않고 감정에 치달아 내놓은 설익은 글밥을 두고도, 그저 허허하시며 따숩게 잘 잡쉈다 해 주시는 독자님들의 넓은 마음에 부끄러워져서.
쥐구멍도 찾을 수 없는 브런치에서 어쩌면 계정을 닫는 게 해결책인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어쭙잖은 경력이며 이력도 지우면 어떨까. 요란한 빈수레를 끌며 우당탕탕 굉음 낼 것 없이 글로 고요히 만나면 자꾸 샛길로 빠져드는 유혹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어설픈 희망일까. 다른 한편으론, 진리처럼 회자되는 문구,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 이제껏 이렇게 살아온 네가 지금 와서 달라지겠다고? 왜 그래 갑자기? 언제나 내면에선 불안과 회의감이 스멀거리며 밀려오고, 남보다도 나 자신이 자꾸 주눅 든다. 나답게 살고 싶은 욕망과 달라지고 싶은 욕구의 나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오가고, 그만큼 사라지는 자신감 속에 자꾸 곁눈질을 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부정과 아니오 속에 위안을 삼는 단 하나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있어 잠시 샛길로 가도 안심이다.
당신이 있어 일탈을 해도 무섭지 않다.
당신이 있어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샛길로 빠지는 건 비단 글만이 아니었다. 내 인생이었다. 혼자였으면 오솔길 정도가 아니라 진즉에 탈선했을 인생이다. 궁색한 삶을 따뜻한 마음을 지닌 당신이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붙잡아 주었다. 어지러이 펼쳐진 복잡한 철로이자 먼 길이지만, 결국에는 다시 만날 길이기에 오늘도 바지런히 걷는다.
참고> '피아노가 이끄는 삶'이 된 '분노의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