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고 나면 원래는 집에 오자마자 바로 씻어야 하는데 가끔 시간 관계상 먼저 먹고 샤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집은 욕조 없이 심플하게 샤워 부스만 있어요. 저는 들어가서 벗고 씻고 머리 말리고 나오기 까지 5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몇 배 이상이 걸리곤 해요. 이유가 뭘까요? 긴 생머리도 아닌데.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에요.
심플한 샤워실은 목욕용품도 심플하게 딱 두 개 뿐이에요. 유아용 샴푸 겸 샤워젤과 성인용 샴푸와 린스 2in1 제품. 스페인에선 그토록 흔한 올리브 오일이나 아르간 오일이 들어간 컨디셔너도 보습제 가득담긴 샤워젤도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원래 사용하던게 있었는데 그냥 다 쓴 후부터는 굳이 안 샀다는게 맞겠어요.
샤워를 하는데 아내가 방금 걸레질을 끝낸 걸레를 건내 줍니다. 하이얀 사각형 빨래비누를 집어 들고 쭈그리고 앉아 비누칠을 하고 솔로 문지릅니다. 빨래비누는 어느새 딱 손에 잡히는 크기가 되어 나름 그립감도 좋습니다. 물로 씻어내니 묻어 있던 먼지들이 1/3평 샤워부스 바닥 구석 저만치 흘러가 자리를 잡습니다. 샤워기로 구석에 있는 찌꺼기들을 모아냅니다. 배수구 위에 얹히는 걸 보고 두었다 따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친 김에 오늘 외출에 사용한 헝겊 마스크도 빨아 봅니다. 한국에서 보내온 헝겊 마스크인데, 착용감도 좋고, 귀도 안 아프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쓸 수있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다보니 이 좋은 마스크를 그간 누가 매일 손빨래를 했나 싶습니다. 쭈그려 앉던 몸을 일으킵니다. 샤워 부스의 유리벽도 한번 씻어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수세미에 거품내고 뜨거운 물로 뽀득뽀득 씻어주니 제 몸 씻은거 마냥 뿌듯해집니다.
샤워기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찬 거울에 닿자마자 물방울이 되어 자국을 남깁니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 몸 닦은 수건으로 거울도 닦습니다. 이번엔 세면대의 얼룩진 수도꼭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제를 살짝 둘러 솔로 벅벅 문지르며 수도꼭지를 닦으니 이왕 한 거 작은 세면대에도 한번 휙 둘러 줍니다. 샤워부스와는 달리 세면대는 거품을 지우려면 일일이 손과 컵으로 몇 번씩 물을 끼얹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물기도 한 점 없게끔 발수건으로 싹 훔치고 나니 확연히 깔끔해진 모습에 스스로 잘했다는 자만감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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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요.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그거였습니다.
아내가 매번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요. 그냥 샤워만 덜렁 했던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잠깐의 샤워 조차 하루의 피곤을 푸는 시간이 아닌 그마저도 할 일이 눈에 보여 손을 대느라 시간이 걸렸을 걸 생각하니... 평소와 다르게 시간이 걸려 욕실에서 나온 남편은 잠시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제가 했다는 걸 몰라서인지, 아님 알고서도 본인 성에 차지 않아서 인지, 핑크 걸레만 빼고 다시 샤워 부스벽과 거울과 세면대까지 닦고 나온 아내를 보고 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스티브의 스페인어 단어 산책
화장실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어요.
일단 가장 기억하기 쉬운 건 뭐라고 하는지 "아세오 aseo"?
집에서는 욕실이란 뜻의 baño 바뇨 라고 해요.
오늘 글 소재였던 샤워는 뭐라고 할까요?ducha 두차 라고 해요.
이 단어는 프랑스어 douche 두쉬 에서 왔어요. 불어는 다시 이태리어 doccia 도챠 에서 왔고요.
모든 유럽어의 뿌리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잖아요?
이태리어 doccia 는 이끌다 라는 뜻의 라틴어 ducere 두체레 에서 왔어요.
물은 어디든 이끄는 대로 따라 가잖아요.
버스를 타면 "기사 conductor 꼰둑또르"가 승객을 모시고,
오케스트라에선 "지휘자 conductor 컨덕터"가 관객을 이끌어 가지요. (같은 단어를 두고 발음이 달라지는거 보이지요.)
우리의 몸은 머리의 명령인 이성을 따르고, 이성은 마음의 감성에 이끌리지요.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마음을 잘 다스려 가며 선한 길을 따라가길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