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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r 10. 2021

식기세척기

한 끼 식사를 마친 그릇들이 들어갑니다

같은 모양 닮은 꼴이 차곡차곡 줄을 섭니다


내 몸에 당장 이것저것 좀 묻어 있어도 괜찮습니다

뜨거운 물과 독한 세제 참아가며 씻기고 건조되면

거듭난 인생처럼 언제고 새로운 모습을 되찾으니까요


세척에 건조까지 마친 후 문이 열리면

후욱 하며 쏟아져 나오는 뜨끈한 김은 

특히나 추운 밤에 고맙기까지 합니다


본래의 담백한 모습을 되찾은 그릇

처음 깨끗한 순간 그대로인 와인잔

올망졸망 이쁘게 놓였던 종지들


저마다 순수한 모습 그대로 돌아간 걸 보니

시간이 지나는 가운데 내 마음 속 켜켜이 쌓인

그러다 어느 순간 가득해진 상처 분노 후회와 아쉬움


그렇게 내 속을 지저분하고 더럽게 만들었던 것들이 씻겨지면 좋겠습니다

혹여 긁힌 자국은 저의 부족한 인격으로 알고 겸손의 표시로 삼겠습니다


하지만 접시나 잔처럼 씻겨지는 것보다 

실은 씻겨주는 식기세척기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 모양의 식기이건 다 받아주고

어떤 응어리진 것도 다 풀어주며

종국엔 젖은 몸 조차 따뜻하게 말려주는

마음세척기


이런 희망을 바라는 건

아직 제 안에 이루어지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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