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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14. 2021

나와 당신의 돈 키호테

불가능을 꿈꾸는 당신과 나의 돈키호테를 위해

스페인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세르반테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돈 키호테>.


원래 스페인어 제목은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 (엘 인헤니오소 이달고 돈 끼호떼 델 라 만차)> 로 우리말로 하면 <라 만차의 재기발랄한 편력기사 돈 키호테> 랍니다. 제목만으로도 숨차요 헉헉.


뭐랄까. 음... 그냥 전에는 그냥 간단히 다방 커피 한잔 했는데 (엄훠, 이거 언제적 얘기니...) 이제는 뭐 하나 시키려면 간단히 '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 디카페인 벤띠' 주세요 라고 해야 하는 느낌 비슷하려나요. 암튼 스페인어는 참 깁니다. (피카소 이름...아시죠. 관련 이야기 글 )




책 제목의 의미를 한 번 볼까요. 

일단, El엘은 스페인의 남성형 정관사입니다. 아랍어 정관사 알Al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밖에 프랑스어론 Le, 이태리어는 Il... 비슷하죠?) 영어를 배울 때는 접하지 못했던 명사들의 문법적 성이 유럽의 언어에서는 존재하는데, 왜 이런 걸 둬서 라고 하면 본인 정신건강에만 해로우니, 그냥 참 세상 힘들게 사는구나 하며 대인배의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Ingenioso 인헤니오소는 영어로도 비슷한 형태의 ingenious (기발한, 독창적인) 또는 clever, intelligent (영리한, 똑똑한) 등의 뜻을 갖고 있어요. 좋든 싫든 학교와 학원, 과외 등으로 배운 영어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다른 외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를 배울 때 정말 유용합니다. 처음 보는 단어인데도 얼추 짐작이 되는 경우가 제법 있거든요. 


Hidalgo라고 하면 엇, 영화 <히달고> (2004년 개봉 영화로 흥행 실패..)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건 스페인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고요. 원어인 스페인어에선 H, h 가 언제나 묵음이에요. 그래서 <이달고>가 맞는 발음이랍니다. 아니, 도대체 그런 글자를 왜 쓰는 거야 생각이 든다면, 역으로 우리말 배우는 외국인이 '모래시계'와 '모레 쉬게'를 놓고 왜 이러냐며 투덜대는 걸 상상해 보길 바랍니다.


Hidalgo는 Fidalgo라는 단어에서 왔다는데, 아이구, 외국인 입장에선 그게 그거 같네요. 의미만 알고 넘어 갈게요. 무언가(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데서, 뭔가 좀 있는 집 자식이다로 확장되어, 하급 귀족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Don 은 남성 앞에 붙여 주는 경칭이에요. 영어의 Sir에 해당이 됩니다. 즉, 돈키호테는 우리말로 키호테 기사, 키호테 경, 키호테 님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원칙상, 띄어쓰기를 하는 게 맞아요. 스페인어로 남성과 여성의 성 앞에 쓰는 존칭이 돈 Don과 도냐 Doña 에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돈이 바로 그 돈입니다.


외국어에 조금 관심 있는 분이라면 Quixote와 Quijote 중 어떤 게 맞는지 궁금해할 분도 있을 텐데, 둘 다 맞아요. 옛 스페인어에선 x (에끼스)를 썼지만, 현대에 와선 대부분 j (호따)로 [ㅎ] 발음을 대신한답니다.


뒤에 나오는 de La Mancha는 <라 만차 지방의> 라는 뜻을 갖고요. 모험담이 펼쳐지는 배경이 바로 Castilla La Mancha 지방이거든요. Mancha 만차는 <얼룩>이란 뜻인데, 지명에 웬 얼룩이냐 싶죠. 메세타 고원이 펼쳐져 있어, 끝없는 지평선 속에 붉은 토양이 심긴 작물에 따라 푸르고, 노랗고, 빨갛고 하는 식으로 얼룩진 듯 보여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참고로, 앞에 있는 Castilla 카스티야는 성 城 Castle 이란 뜻이고요. 통일 스페인을 이룬 왕국의 이름도 바로 카스티야 여서, 스페인 국기에는 성 城 문장이 들어가 있어요.


스페인 국기. 양 기둥 사이 왕관 아래에 성城 Castilla 문장, 보이시죠.


만차 Mancha라는 말에서 스페인의 커피도 나와요. 바로 만차도 Manchado라는 커피랍니다. 라떼 (Latte 이태리어로 우유란 뜻) 보다 우유를 더 듬뿍 넣고, 커피는 조금만 흘리듯 넣어, 표시가 된, 또는 얼룩이 진 (manchado ; stained, marked) 거라고 해 이름을 그리 붙였어요. 세상에,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 유치한 뜻으로 지었단 말이야? 라며 실망할 수 있는데, 스페인의 만차도 Manchado에 대한 이태리 버전이 뭔지 짐작 가세요? 바로 마끼아또 Macchiato랍니다! 우유로 얼룩덜룩 해진 에스프레소가 바로 <까페 마끼아또>이고요, 우유 위에 카라멜로 얼룩덜룩 문양을 낸 게 바로 <카라멜 마끼아또>가 된 것이죠. 이제 마끼아또 주문할 땐, 아하~ 얼룩이, 바둑이, 송아지... 죄송합니다.


라 만차 La Mancha라는 지명에서 마끼아또 Macchiato 커피로 흘러간 김에 하나만 더, 거기에 어울리는 빵 얘기도 있어요. 라 만차 앞에 들어가는 이름 있었잖아요, 카스티야 Castilla. 여기서 뭔가 비슷한 빵 이름 떠올려지는 거 있잖아요. 맞아요, 달달하고 부드러운 스펀지 케이크, 카스텔라 Castella죠! 그렇담 둘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선보인 물건 중에 하나가 바로 카스티야의 빵 Pão de Castela (빠옹 지 까스뗄라)이였어요. 우리나라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네 왕국이 있었는데, 그중 포르투갈 국경에 접해있던 왕국이 바로 카스티야 왕국이었거든요. 그러니 그들에겐 카스티야가 곧 지금의 스페인인 셈이죠. 그래서 카스텔라를 다른 나라에선 대부분 스페인의 빵 (프랑스어 Pain d'Espagne, 이태리어 Pan di Spagna 등)이라고 부른답니다. 재밌는 건, 우리가 먹는 카스텔라의 원조는 일본이고, 나가사키의 특산품이라는 거!


자 이렇게 해서 책 제목 풀이를 살짝 해 보았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뭐, 우리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글 따라 산책하러 나온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요? 제목 알았으니, 이제 돈 키호테의 내용도 살짝 살펴봅니다.


두툼한 목침용 책으로도 딱 좋은 돈 키호테의 한 줄 요약은 '기사 코스프레 노인의 모험담'이라 할 수 있어요.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인이, 기사문학을 탐독하다 그만 정신이상으로 편력기사로 스스로를 여기고, 키호테 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데리고 다닐 종자로 농부인 산초 빤사(Panza, 배불뚝이란 뜻입니다, 땅땅땅 판사님, 아니에요)와 함께 라 만차 지방을 누비면서 겪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어요.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 그 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 책은 예순을 바라보던 작가 세르반테스는 세비야에서 수감생활 중에 작품을 집필해 1605년에 전편을 펴냅니다.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 전 유럽에 인기 몰이를 했지요. 17세기에 무려 3만 부나 팔렸을 정도면, 지금 입장에서 봐도 정말 엄청난 베스트셀러인 거죠. 그래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대신 그 엄청난 인기 덕에 온갖 해적판이 출몰합니다. 찐작가로서의 고심이었을까요. 작심하고 십 년이 지나 1615년에 속편을 출간하며 더 이상의 불법복제물이 못 나오도록 아예 주인공을 하늘로 데려가 버립니다. (헉!)




책을 읽어본 적은 없어도 돈키호테 하면 아, 풍차에 돌진하고서 나동그라진 정신 나간 할배 정도로는 다들 알고 있지요. 재밌는 건, 돈키호테는 평소엔 너무나 멀쩡해요. 상식과 예의를 다 갖추었죠. 그런데, 잘 가던 중에 정의를 구현할 기회와 같은 편력기사로서의 의무를 다 할 기회만 맞닥뜨리면 정신을 못 차려요. 기사 코스프레라고는 하지만, 실은, 어찌 보면, 덕중의 덕인 양덕의 길로 간 거 아닐까요.


돈키호테는 작가가 아닌 소설의 주인공 키하노가 스스로를 창작해 낸 인물로 본다면 어떨 것 같나요. 주인공이 작가 역할을 하는 거죠. 그 설정부터가 정말 남다르지 않나요. 또한 정의와 이상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해요. 하지만 그의 숱한 시도 중에 성공한 건 없습니다. 그야말로 루저 인생, 그 자체였어요.


온갖 황당한 일을 겪던 그는 결국 자신을 고향에 데려가려는 자와 결투를 치릅니다. 결투에 패배해 약속을 지켜 고향으로 돌아오지요.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정신 나갔지만 정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기사 돈키호테가 아닌, 그저 선한 평범한 인간 알론소 키하노로 생을 마감해요. 하지만 그때 가서 산초는 부르짖습니다. 다시 모험을 떠나자고요. 왜 그랬을까요.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다니, 이런 생의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평론가들은 세르반테스와 동시대를 살다 같은 날 세상을 떠난 (실은 역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지만)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의 주인공 햄릿을 놓고 비교합니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로서 이게 맞으니 이걸 선택해라 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세상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 있다 라는 것으로요. 돈키호테로서 뒷일은 아몰랑, 일단 앞만 보고 행동으로 저지르고 볼 것이냐, 아니면, 햄릿처럼 매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미주알고주알 머리 싸매며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하게 살다 갈 것이냐 (매운맛 버전), 또는 신중하고 사려 깊게 작가의 서랍 속에 보류하고 있을 것이냐 (순한맛 버전)


인생 앞에 놓인 일들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 각각의 상황에서 어느 쪽에 좀 더 비중을 둘 것이냐는 식으로 선택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키호테는 그때마다 보여줍니다. 훑어대는 시선부터 시작해 충고, 조언, 평가, 판단 등 자신은 원하지 않음에도 쏟아내는 그들의 입김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맡기지 않아요. 온전히 직시하고, 깔끔하게 결단 내리고, 우직하게 행동하는 자유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살고 있음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요.


편력기사인 그가 꿈꾸던 유토피아,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거침없이 몸을 던진 돈키호테는, 과연 단순히 미치기만 한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스페인의 사상가 미겔 데 우나무노는 소설 속 돈키호테는 회심 후 죽고 말았지만, 진짜 돈키호테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 돈키호테는 우리 자신이 우스꽝스럽도록 계속 자극하고, 이 돈키호테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지요. 


아직도 코로나로 힘듭니다.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럼에도 꿈을 꿔야 합니다. 그래야 마주한 현실이 두렵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여기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소설의 돈키호테는 끝났지만, 현실의 돈키호테는 지금 수련 중입니다. 불가능을 꿈꾸는 당신과 나의 돈키호테를 위해 ¡Ánimo! (아니모,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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