넣고 끓이냐 끓이고 넣냐. 이건 흡사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아, 이건 아니겠구나, 탕수육의 부먹 찍먹 논쟁에 이은 한국에서만 볼 재밌는 상식과 기호의 대결이 될 거 같다.
다른 집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집에서 라면이 차지하는 위상은 특식 중에서도 특식에 속한다. 일단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가격도 한국에서의 두 배 가량 되다 보니 먹고 싶어도 손이 쉽게 가지 않는다. - 안성탕면 기준으로 구글링 해 보고 계산기를 두들기고 보니 결과에 라면에 대한 침샘을 거둬간다.
우리나라에선 20개에 9,290원이라 개당 465원인데, 알칼라 데 에나레스의 중국 식품점에선 1.20유로로 한화 1,599원이라고 하니, 헉, 무려 3.4배나 된다. 이래서 숫자 계산은 무섭다. 안 그래도 자주 먹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더 자주 손을 대지 않을 듯 싶다. 그렇다고 이 곳 라면들은 도저히 한국 라면의 쫄깃만 면발도 얼큰한 국물 맛도 뭐하나 흉내도 못내고 있으니 고민이다. 나에겐 어떻게 끓이냐 라는 과학적 명제 이전에, 집콕만 하고 있는 이 코로나 시국에 과연 3배나 주면서까지 사 먹을 가치가 라면에 있느냐 없느냐 라는 나름 철학적인 문제 (라고 쓰고 쩐의 문제라 읽는 것으)로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
돈의 가치야 어쨌든 간에 그 분의 과학적인 논란과 글은 기사와 칼럼을 읽어가며 과학적 지식과 상식의 재미를 충분히 맛 보았다. 자, 그렇다면 다시 논쟁의 발단으로 돌아가서 과연 나는 어떻게 끓일 것인가.
눈대중 보다는 정확한 계량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 귀하고 비싼 라면을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니, 한국사람이 그깟 라면 하나 먹는데 무슨 계량을 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 드린다. 여기 라면 한봉지는 한국의 3.4 봉지다.(그 옛날 추억의 3.4 우유 아님) 이건 1+1으로도 못 따라잡을 양이다.
게다가 주방의 냄비는 생각보다 다양한 크기로 구비되어 있다. 편수 냄비 (손잡이 하나), 양수 냄비 (손잡이 둘), 웍wok 스타일의 냄비 등. 그럼 그 중에 하나만 쓰면 되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식기 세척기를 쓰면서 없으면 다른 걸로 어떻게든 활용하다 보니 대충 끓여 조리한다는 건 그냥 안 먹고 말겠다는 말이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라면 봉투 뒷면 조리법을 보면 550ml 이라는 숫자 옆에는 "맥주컵으로 두 컵 반" 이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컵? 집에서 맥주컵이라고 부르는게 없는데, 유리컵, 사기컵, 커피컵... 통일성이라곤 없이 모양도 용량도 다 제각기인데, 뭘 보고 맥주컵이라 해야하나.
수학은 못하지만 정확한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설명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학시간 비이커도 아니고 굳이 라면 하나를 위해 계량컵을 사 달라고 할 건 아니었다. 결국 대충 물 받아서 끓여 보았으나 국물색은 멀겋고 간은 안 맞았다. 그 와중에도 '사나이라면 ㅅ라면' 이라는 광고문구에 인이 박혀 다른 건 안 사 먹었다. 그 결과 먹을 때마다 매운 국물 때문에 아랫 입술 팅팅 붓고 아린 혀를 식힌다며 라면 먹으면 바로 아이스크림을 찾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나중에 화장실에서의 고생이란 참, 미련해도 너무나 미련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라면의 매운 기운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달걀도 깨서 넣는데, 아니 내가 이렇게 싱거운 (그러면서도 매운) 걸 먹으려고 굳이 달걀까지 풀어가며 준비했나 하는 자괴감 마저 느끼기도 했다. 의외로 물을 부족하게 넣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웃긴 건 끓이다 보니 물이 부족한 걸 알고 물을 넣는 순간 다시 그 전처럼 멀건 지리탕이 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맛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마는 그 마법같은 순간이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렇게 살아오다 마침내 계량컵을 슈퍼마켓에서 발견하고는 두번 고민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무려 9가지의 식재료를 구분해서 무게와 용량을 잴 수 있는 만능 유리 계량컵. 단돈 3유로만 주면 해결할 것은 라면 입문 30년도 넘게 해맨 걸 생각하면 그저 피식 웃음만 나온다.
덕분에 면 요리는 내 담당이다. 심지어 국물 요리가 아닌 파스타도 내가 면을 삶거나 끓이면 엄마가 한 것 보다도 더 맛있다고 세 아이들이 입을 모으는 까닭에 어김없이 내게 앞치마가 맡겨진다. 잘 먹어주는 게 상차림을 하는 자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자 즐거움이 되는지는 아이를 낳아보고서야 알았다.
그렇게 늘 계량컵에 의지를 하다 보니 뭔가 이제는 감이 생긴 느낌적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탈을 해봤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 했는데, 난 사람이니까 석 달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니겠어 하며. 정확한 구입일자는 모르겠으나 사용기간은 분명 3개월 보다는 그 보다 충분히 길었다 자부한다.
물만 눈대중으로 받을쏘냐. 평소 가위로 깔끔하게 잘라내던 라면 봉투도 이 날은 손으로 화팍 뜯었다. 계량컵은 찬장에 그대로 두고, 양수 냄비에 물을 대충 받아봤다. 다만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은 살살 틀었다. 괜히 일탈시도했다가 또 물만 흥건해지고 비싼 라면 버릴까 봐서. (이 소심함은 평생 가져갈듯)
자, 그리고 논란이 되는 것처럼 한 번에 다 넣고 끓였다. 실은 이렇게 끓이는 건 이미 중학생 때부터 해오던 버릇이었다. 가장 쉽고 편했기 때문이었다. 면을 계속 끓여대는 탓에 언제나 푸욱 익은 상태였지만 내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밖에서 라면 사 먹을 때도 의외로 그 차이점에 대해 둔감했다. 그저 적당한 매운기와 짠 맛만 있으면, 무엇보다도 단무지와 김치만 있으면 면발은 아무래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러다 결혼 하고서야 비로소 아내에게 라면의 정석이란 면발에 있으며 그 면발은 젓가락에 집어 올릴 때 쫄깃해서 스프링 마냥 오르락 내리락하고, 심지어 탱탱해야 한다는 걸 (또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일단 계량컵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커피포트 눈금을 이용해서 가급적 물의 양을 맞추고, 무엇보다도 라면 제조사의 4분 30초라는 recommended 시간을 맞추자 정말 띠요옹 하는 식감의 면발이 나왔다.
다섯 식구는 그 라면의 쫄깃함에 환호성을 지르며 역시 면요리는 아빠임을 재확인했다. 별 거 아닌데서 자신감을 얻자 그 파급력은 기운까지 북돋워 주었다. 게다가 첫째와 둘째도 자기가 직접 라면을 끓이고 싶어했다. 해서 물 양을 정확히 재는 것부터 시작해 마지막에 달걀 풀고 그릇에 옮기는 것까지 가르쳐 줬다. 아이들도 자기가 한 걸 먹으며 만족했고, 매우 강한 자신감을 +1 획득했다. 라면 하나로 자신감까지 얻는 라면효과가 우리집에는 유효하다.
라면의 국물은 다행히 잘 맞았다. 면발도 불지 않았다. 파도 달걀도 콩나물도 그 어떤 것도 넣지 않은 태초에 제조된 그대로의 맛. 뚜껑을 열어보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느낌이 왔다. '성공했어.' 규칙을 따르는 데서 얻는 성취감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나만의 느낌으로 감 잡고 해도 동일한 결과를 얻어내자 마치 달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한국에선 중학교를 앞둔 아이도 능숙하게 하는 일을, 그보다 서른 가까이 더 먹은 아재가 이제야 해냈다.
이 모든 해프닝은 정말 별 일 아니다. 그래봤자 라면 한 그릇이다. 넣어서 끓이든 끓여서 넣든 간에.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얻었다. 퍼진 면발 말고, 홍수난 국물 말고. 면도 딱, 간도 딱. 그래, 자연스러웠고 완벽했어. 계량컵 없이 면 끓이기, 그 작은 도전에서 얻은 성취감은 불투명한 앞날에 대해 기분 좋은 기대감을 심어준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