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15. 2021

아들에게 쓰는 엽서 한 장

손편지의 맛

중1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들. 하루에도 몇 번씩 세 살, 여덟 살 아래의 동생들과 장난치고 까불다가도, 어느 순간 훈계를 일삼으며 무언가 장남으로서 집안 분위기를 잡아가려는 것이 영락없이 아빠의 어렸을 적 모습이다. (동생 미안해)


아빠와는 다행히 아직까지 큰 다툼 없이 지냈으나, 간혹 엄마와 의외의 일에서 의견 차이나 감정 충돌이 벌어질 때가 있다. 아빠가 끼어들 자리도 없고, 끼어서도 안 된다. 흔한 말로 낄끼빠빠를 아는 것이다. 그저 찾아가서 문을 조용히 닫아 줄 뿐이다. 그러면 한참을 얘기가 오고 갔어도 결국 화해하고 어깨 토닥거리며 서로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무심히 지나던 차에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친한 누나가 책과 함께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몇 장은 안방 벽에 붙여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엽서. 남은 몇 장이 책장에 때마침 있었다. 아내가 아빠로서 모처럼 큰 녀석에게 편지를 하나 써주면 어떻겠냐 한다. 안 그래도 나도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어 바로 적었다.




글로 적으면 말로 할 때보다 한결 순화되어 전달이 된다. 그건 꼭 쓸 때마다 생각을 해서가 아니라 단숨에 써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다. 말은 아무래도 필터링 없이 바로 나가는 편이 크지만, 글을 쓸 때면 손과 연필 또는 펜의 도움을 받아 가기 때문에 그런 듯싶다.


하여 쓰는 나도 감정 조절이 되지만, 읽는 아이도 한결 차분하게 되새겨 본다. 오랜만에 써본 만년필이라 글씨는 불혹의 아빠가 아닌 사춘기의 아들 마냥 삐뚤빼뚤 하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아이 방으로 갔다. 꾹꾹 마음을 눌러 담은 엽서를 슬그머니 아이 방의 책상 위에 두었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온 아이는 자기 방에 들렀다가 아무 말 없이 아빠에게 쓱 다가온다. 엽서를 들어 보이며 선물 받은 느낌이라며 기분이 너무나도 좋단다. 평소에는 사진 찍자고 해도 안 찍던 녀석이 이번에는 제 스스로 엽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어 달라 한다. 자기 카톡 프로필로 사용하고 싶다며.




큰 아들의 키는 어느새 아빠의 턱 밑을 넘어 이마까지 올라왔다. 몸무게는 엄마와 같다. (여자의 몸무게는 절대 비밀이다) 신발은 아예 아빠인 내 껄 그대로 신을 정도다. 그렇게 훌쩍 커버린 녀석은 덩치에 안 맞게 무척이나 세심하다. 엄마와 함께 카톡의 즐겨찾기로 올려져 있는 아들의 프로필에 들어가 보면, 계절이며 명절 때마다 온갖 스티커와 문구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작은 놀래킴으로 기분 좋게 찾아가야겠다. 그간 아껴두었던 다른 만년필도 꺼내 봐야겠다. 좋은 글로 아들과 추억에 남을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해 본다.



덧글. 사진을 유심히 보실 분들을 위해 남깁니다. 사춘기의 한자가 좀 이상해 보이죠? 오해하실까 봐 아들 엽서에 쓴 사춘기 부분만 살짝 인용합니다 :... 원래 사춘기의 기는 시기라는 의미의 기期를 써야 하지만 아빠는 기록을 남긴다는 뜻에서 記라고 써 봤다. 마음에 어렵고 힘든 일 있을 때 어딘가에 써 보길 바란다... (후략)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는 이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