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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r 05. 2021

스페인 적십자 카드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한 달 보름쯤 전 아내의 맛난 치킨을 먹으려던 찰나에 예정에 없던 적십자사의 방문으로 삼십 여분 간 얘기를 나누다 엉겁결에 후원을 작성하며 국제적인 호구가 된 적이 있었다 - 지난번 글 참고 [스페인 적십자사]

글자 수에 제한이 있는 인스타에도 분량을 나눠서 올리고서 받은 다양한 댓글 중에는, 당시 둘째 아들의 염려처럼 금융사기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우려도 있었다.


맞다, 우리로 치면 주민등록번호에 해당되는 내 신분 번호도 알려주고, 전화번호, 이메일에 통장번호까지 몽땅 알려준 터라 아내도 걱정을 했다. 혹여나 정보가 유출되면 어떡하지 하고.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세상 많은 경험 중 돈으로 직결되는 사기는 당해본 적이 없다.


나는 당시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 절차상 전화까지 다시 모든 정보를 재확인 받았기에 '설마 그럴 리가' 했지만, 내심 찜찜하긴 매한가지였다. 며칠 지나고 나니 이메일이 왔다. 열어보니 스페인 적십자사에서 보낸 거였다. 이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2주에 한 번꼴로 나름의 소식을 전해주는 메일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통에 일반 편지보다는 약간 큰 크기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선명하게 찍힌 Cruz Roja 적십자.


뜯어보니 홍보물 비슷한 게 여럿 있었다. ¡Gracias! 그라씨아스 라고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종이도 보이고. 그중 특이한 건 카드였다. Socio 소씨오 라는 이름의 빨간 카드. 영어로 치면 partner에 해당되는 것으로 스페인 적십자사 회원임을 증명해주는 카드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걸로 무슨 혜택이 있는지, 사용처가 무엇인지는 카드에도, 편지에도 일절 말이 없었다. '멤버십 카드라면 그래도 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조회해 보았지만,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마음에 안 들어서 취소함, 탈퇴했음, 가입 해지 등의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일일이 들어가서 확인하진 않았지만, 다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결국엔 기대에 미치지 못해 부득불 취소하고 말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랄까.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적십자 회원 카드가 나는 아닐까. 코로나 이후 어디에서도 딱히 쓸모가 없어 보이는, 뭔가 좋은 건 알겠는데,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무엇에 유용한 건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길 없어 보이는, 그냥 겉보기에만 윤이 나는 한 장의 플라스틱 카드와 같은 나.


그러다 여러 장의 엽서 만한 크기로 나온 홍보물 중 적십자 봉사자 조끼를 입고 있는 에두 아저씨가 반갑게 건네는 ¡Hola! 올라(안녕)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그 아래 문구, soy voluntario porque me gusta ayudar a las personas. '나는 자원봉사자예요, 사람들을 돕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가 자꾸 입에서 맴돌았다.


맞다. 전에 영어 강사와 가이드로 일할 때, 일로서 다가오기보다는 좋아하는 걸 즐기는 중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강사든 가이드든 사람을 만나며 일을 하는 건, 나를 돕는 것이자 (돈을 버니까) 동시에 남을 돕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를 만나서 지식도 얻고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웠으니까).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문자로, 전화로, 댓글로, 편지로, 직접 만나는 걸로, 그처럼 사람들과 나누는 게 좋다. 차이라면 돈의 유무일 뿐이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말처럼 지금 당장은 내게서 멀리 나갔지만 언젠가 돌아 돌아 다시 오지 않겠는가.




쓰임새가 있어서 중요한 것도 있지만, 주위에는 필요 유무를 떠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있다. 필수품들은 쓰임새가 중요하다. 없으면 당장 큰일이다. 기호품은 없다고 해서 생사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삶의 만족도는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이 정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치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는 상관없이 나만의 가치를 부여해 나만의 명품으로 삼는 것'이 내가 정의하는 기호품이다. 


생각해 보면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건 생필품이 아닌 (쓸모라곤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장식품이지 않았던가. 가죽 책 커버가 책을 영구 보관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액자가 그림의 쓸모를 더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있음으로 기존의 가치를 더해주는 건 분명하다. 


인간은 값으로 매길 장식품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소모하고 버릴 생필품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빛나는 나의 삶의 이유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싶은 카드에서 결국 돈이 될 쓸모나 혜택은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고마움마저 느낀다. 반지갑 속 한 칸에 자리 잡은 카드의 빨간색이 기대와 설렘으로 내 심장을 평소보다 더 바삐 뛰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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