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는 공원이 있다. 실은 별 것 없이 그저 잔디와 올리브며 벚나무, 그리고 몇 개의 벤치만 덩그라니 있는 공터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그냥 산책하며 쉬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두 아파트 단지 사이에 위치한 널찍한 이 공원엔 까페이자 음식점이 하나 있다.
지극히 평범한 마을 식당에 불과하지만, 공원 옆 자리이기에 금요일 오후와 주말엔 늘 사람이 북적인다. 아파트 주민들, 자전거 동호회 아저씨들, 대학 청년들 등 늘 나왔다 하면 최소 네댓명 씩은 자리를 차지한다. 식당 안에도 제법 자리가 있지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흙먼지가 일고 근처에선 버스가 지나가더라도 화창한 밖을 선호한다.
스페인 사람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광적이라 할 정도로 햇빛에 집착을 한다. 이유? 왜냐고 물어보면, 되려 그들은 "아니, 어떻게 이 좋은 햇빛을 싫어할 수 있어?" 반문하며 질문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래, 푸른 공원을 바라보며,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고, 잔디 위에서 꺄르륵 대는 아이들, 테이블 아래에서 낮잠 즐기는 큰 개들, 거기에 네 명이면 네 명 다, 다섯이면 다섯 전부 저마다의 하고픈 얘기를 잠시도 쉬지 않고 말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없던 활기가 생길 것만 같다.
소쿠리 하나 엎은 볼록한 배 때문에 주인이자 웨이터인 마리아노 아저씨는 언제나 셔츠 단추 세 개를 푸르고 싱글벙글 손님을 맞이한다. 마리아노 아저씨의 성은 Delgao 델가도, 슬림하다는 뜻인데, 식당에 일하는 본인은 직업상 날씬하면 안 된다며 유머러스하게 말씀하신다.
살짝만 곁다리로 얘기하자면, 스페인 성에는 의외의 이름들이 있다. 생선 통조림 회사로 시작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한 80년 전통의 스페인 식품기업, Calvo(깔보) 그룹은 창업자인 Luis Calvo Sanz 씨의 성을 그대로 쓴 건데, 스페인에선 굉장히 흔한 성 중에 하나다. 헌데, 그 뜻이 무엇이냐면... 대머리 이다. (농담이냐고요? 레알입니다!) 이전 회사의 매니저 중에도 성이 Calvo인 분이 있었는데, 본인은 머리숱이 타이가 기후의 침엽수림이라정 반대라며 웃었던게 기억난다.
약간은 걸걸한 목소리로 기분 좋게 맞이하는 아저씨 덕에 나와 아내가 이 곳을 찾아오게 만든다. 그런 정겨운 곳이 올해 초 갑자기 문을 닫았다. 한 달 반 정도 쉰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와 점심을 먹이고, 다시 오후에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면, 하교 때 가서 데려오기 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았던 곳인데, 둘만의 아지트가 임시폐쇄 되었다니 아쉬움이 꽤 컸다.
한 달 반이 지났는데도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스페인은 100명당 7명 꼴로 코로나 확진자가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이 분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생각했다. 어찌되었건 무사하셔야 할텐데... 하도 주위에 코로나 때문에 한달 정도씩 문닫은 가게를 보다 보니, 여기도 그런 것일까 하는 마음에 무탈하시기를 바랬다. 다행히 석 달 가까이 기다린 끝에 다시 열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유쾌했고, 웃음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양 손에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미처 물어 보기도 전에, 먼저 말을 붙이신다:
-이거 봐봐, 나 그동안 수술했어. 어느 날 갑자기 물건을 못 쥐겠는거야. 병원에 가보니, 신경이 끊어졌더래. 그래서 수술을 해야 된다는거야. 처음엔 오른쪽이 그랬는데, 수술 후엔 왼손도 그렇게 됐어. 그래서 또 수술 받았고, 계속 쉬어야 됐어. 그런데 이젠 괜찮아, 진짜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다 괜찮아.
세상에나, 아저씨의 양 손목엔 실밥 자국이 너무도 선명했다. 한국인에 비해 조금은 손끝이 야물지 못한 스페인 사람들의 솜씨가 마리아노 씨의 수술에도 그대로 남기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주제 넘게 오지랖 떠는 생각이 밀려오자, 순간 어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전엔 몰랐는데, 굵다고만 생각했던 손가락이 전부 퉁퉁 부어 보였다. 아이구,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본인 얘기를 마친 아저씨는 식당 안으로 들아갔지만, 내 안에서 뻗친 오지랖은 이미 잔가지를 타고 이어갔다.
평소엔 커피만 마시고 말았는데, 오늘은 따빠스 (핑거푸드와 같은 간단한 먹거리)라도 시켜야 될 거 같았다. 그래서, 점심 먹은지 한 시간 정도 밖에 안 지나 전혀 출출하지 않았지만, 순전히 오지랖 덕에 주문한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또르띠야로 (우리가 아는 토르티야는 멕시코식 빵으로, 여기선 계란 오믈렛을 말한다)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래, 이 맛이야.' 할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 손의 신경수술을 받고 무사귀환한 마리아노 아저씨의 넉넉한 인심과 석 달 넘게 마음 졸이며 기다린 우리의 바램에 대한 소소한 보상은 다 받은 기분이었다. 잠시 잃어버렸던 일상의 일부를 다시 찾은 기분에 나의 스페인 오후는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돌아와 줘서 반갑고 고마워요, 마리아노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