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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05. 2021

꽃을 배달해 드립니다

꽃이 있는 삶

퇴사를 하고 한국에 가니 가족이 꽃집을 오픈했다.

때마침 첫 대량 주문이 들어왔는데 한 회사에서 가정의 달을 맞이해 사원 가족들에게 꽃바구니를 배달하기로 한 것이다. 퇴사자(a.k.a 백수) 신분으로 한국에 갔던 나는 자연스럽게 꽃배달 기수로 투입되었다.


서울 전역은 물론 지방에까지 포진되어 있는 고객님들에게 전문 배달 업체를 써서 꽃바구니를 배달하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에 역시 줄일 구석은 인건비였다. 그리고 인건비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놀고 있는 가족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나는 꽃바구니를 들고 내곡동, 마장동, 잠실 올림픽단지, 연희동, 청담동, 삼각지를 비롯하여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의 캠퍼스로 배달 가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마지막에는 펜션을 운영하는 고객님을 찾아 남양주까지 갔다.




실은 가족이 자동차로 고객님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면 나는 꽃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올라가 벨을 누르고 꽃만 전달해주면 되는 일이라 힘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나 재밌고 즐거웠다. 이 동네는 이렇구나 신기해하기도 하고, 여기 아파트 단지는 왠지 참 정감 가고 좋네 생각하기도 하고, 연희동에 간 날은 유명하다는 피터팬 빵집에서 빵도 플렉스하고, 담쟁이넝쿨에 둘러싸인 건물이 멋있었던 연세대 캠퍼스에서는 배달하던 꽃바구니를 들고 사진도 잔뜩 찍었다. 무지 넓었던 서울대 캠퍼스도 쉬엄쉬엄 걸으니 산책하는 것처럼 좋았다. 마지막으로 남양주에 가던 날은 비가 왔다. 그래서 안개가 낀 북한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가 무척 운치 있어 마치 드라이브하는 기분이었다.


장 좋았던  꽃바구니를 받는 고객님들을 보는 것이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다들 천사처럼 환희 웃으시며 받고 고마워해서 내가 대단한 물건이라도 전달해 주는 것처럼 뿌듯하고 같이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를 안 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다행이다. 나도 웃어줄 수 있고 꽃바구니를 받던 고객님들의 미소도 볼 수 있었어서.




보통 어렸을 적에는 꽃을 좋아하다가 삶에 찌들면서 꽃 선물을 싫어하게 되기 마련인데 나는 반대였다. 애늙은이 구석이 있던 20대 무렵에는 꽃 선물을 '실용적이지 못한 것'이라 치부하다가 30대가 되고 나서부터 꽃이 좋아졌다. 내가 생각하는 풍요로운 삶의 기준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한 개가 '생화를 사고 싶을 때 망설이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다. 꽃, 그까짓 것 평생 안 사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다. 차라리 명품가방은 꽃보다 훨씬 비싸지만 두고두고 자랑할 수라도 있다. 꽃은 며칠 내로 반드시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꽃을 사는 비용을  '버리는 돈'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꽃이 집에 있는 동안, 집은 생기가 돈다. 평범했던 침대 옆 탁자도 근사해지고, 일상의 식탁도 풍성해진다.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고 좋은 게 꽃이다. 그러니 꽃을 사고 싶을 때 턱턱 살 수 있는 돈, 그만큼만 벌고 살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꽃을 좋아해도 시들 걸 알기 때문에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좌) 한국 있을 땐 팔고 남은 꽃 덕분에 집에 늘 꽃이 풍성해서 좋았는데... | 마드리드 꽃집에서 산 꽃 (우)  


그러고 보니 꽃을 안 산지 꽤 되었다. 그만큼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인가 싶다. 조만간 몽실몽실 꽃잎이 통통한 꽃을 한 아름 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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