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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Jan 10. 2022

민주적인 좀비 (2)

오늘  일은 감자튀김의 기름온도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가게  교차로에는 좀비들이 광고풍선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문은 많았다. 가게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주로 노인들이었고, 그들은 햄버거의 맛에 대해서 욕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가지 않았다. 햄버거 빨리 달라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방 환풍구 벽면에는 영수증이 계속해서 붙었고, 나는 기름에 손이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감자를 뒤집고, 버거를 조립했다. 버거를  만들고 나면, 나는  버거를 카운터에 넘겼다. 카운터 알바는 고등학생이었다. 가게는 대학가에 있었지만, 여기서 일하는 대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업무량도 많고, 감정노동도 심하고, 커리어에 도움도  되는  곳에서 대학생이 있을리가 없었다. 모든 알바가  힘들긴 했지만,  곳은 대학생의 타이틀을 들고 오기엔  그랬다. 대학을 다니는 내가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유는 스케줄표 때문이었다. 매주 새롭게 스케줄표를 짜는 시스템 덕분에 나는 수업을 듣고,  일을 하고 다른 알바도   있었다. 매주 일정을 조절할  있다는 장점 하나만을 보고 나는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막내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다른 일은 배달이었다.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 모두 끝나면 나는 전기 자전거를 타고서 라이더가 되었다. 배달용 전기자전거는 취미용 자전거와 달리 안장 뒤편에 거대한 박스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자전거여도, 그 박스가 있으면 구려보였다. 알바나 수업이 끝나는 8시부터 11,12시까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찜닭, 부대찌개 등을 옮기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광고를 본 후부터였다. 광고에서는 배달만 하면 돈을 대기업 사원만큼 벌 수 있다고 했었다. 그 광고의 문구는 정확히 이랬다. ‘비는 시간 30분씩만 투자하면, 누구나 쉽게 투잡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날은 웬만한 직장인만큼의 일당을 번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토바이로 차들 사이를 질주하지 않고 전기 자전거를 돌리면서 우측통행을 하는 이상, 그렇게까지 돈을 버는 건 불가능했다.


라이더일은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갔다. 전기자전거를 꾸준히 관리해주면서 나가는 비용은 기본이었다. 가끔 넘어지거나 해서 음식이 쏟아지면 그 음식값을 보상하고, 다시 새로운 음식을 받아가는 과정에서 드는 돈과 시간도 상당했다. 비는 시간 30분씩만 투자를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내가 지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적어도 3시간은 길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만약에 비는 시간 30분씩만 투자를 해서 진짜로 대기업 사원만큼의 수익이 안정적으로 나올 수 있는 일자리였다면, 모두가 배달을 시키는 게 아니라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라이더를 할 때 느껴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내가 위험을 가져올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철역 앞에 있는 가게에서 음식을 받고서 자전거에 짐을 실을 때,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왜 보는지 이유는 몰랐다. 여자가 라이더를 해서? 자전거가 특이해서? 그냥 라이더라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조금 부끄러웠다. 빨개진 얼굴로 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지하철에 많던 사람들은 금방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온 몸이 땀에 쩔었기 때문에 근처에 아무도 없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좀비가 사람보다 나았다. 좀비는 내 냄새를 맡고서 눈쌀을 찌푸리진 않으니까. 난 다들 내린 지하철 칸의 끝자리에 앉았다. 기둥에 기대자 쇠 특유의 차가운 느낌이 머리에 닿았다. 하루종일 달궈진 내가 식고 있었다. 전기자전거가 학교 근처에 있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집에를 가기엔 너무 힘들었다. 애초에 자전거도 내 것은 아니었고, 장기렌탈한 것이라서 가져가기가 애매했다. 지하철 창문 밖에는 차가 뻬곡했다. 막차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한강다리는 한강다리였다.


“학생 일어나요! 종점이야 종점!”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난 몸을 흠칫하며 일어났다. 이미 지하철은 종점이었다. 역은 조용했다. 날 깨우는 청소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 짜증은 스산하고 으스스한 늦은 밤의 지하철의 분위기를 날려주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팔자걸음을 하고서 느릿느릿 역사를 빠져나갔다. 지하철 공익요원은 셔터를 내리기 전에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퇴근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지만, 내가 굳이 그 마음에 부응하기 위해서 서둘러줘야 할 필요까진 없는 거 같았다. 난 그냥 그 속도 그대로 지하철역을 나갔다. 아직 12시가 넘은 시간은 아니었던 탓에 밖은 밝았다. 술집에는 아직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난 가방을 추켜올리고 지하철 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집이 서울에서 멀어 종점에서 3정거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골목에 있는 사실은 이럴 땐 다행이었다. 지하철선로를 조금만 따라가면 집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또 어디서 놀고 다니길래 이제서야 들어오는 거냐.”


아직 운동화를 벗지도 못했는데, 아빠의 잔소리가 들렸다. 아빠를 마주하는 게 언제부터 불편해졌지? 초등학생 때 운동회에 와달라고 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한 순간부터였나, 중학생 때 급식비 지원서를 직접 내기 싫다고 찡찡 거렸던 순간부터였나, 수능이 망해서 재수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한 순간부터였나, 아빠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부터였나, 내가 하는 알바비로 밥을 먹으면서 나를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 취급할 때부터였나,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아빠는 불편했다. 아마 아빠도 나를 불편해할 것이었다. 아마 그는 그대로 내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저 애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사랑하는 내 딸이 어딘가 잘하는 것이 있겠지.’ 아빠는 아빠의 방식대로 내게 잘해주려고 하고 있겠지. 아빠가 나와 인사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게, 내 눈치를 보는게, 그리고 눈치를 보고서 하는 말이 고작 저런 말인 게 모두 상처였다. 아주 어릴 때에는 가장 존경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보기 힘들었다.


난 아빠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굳이 서로가 불편해질 필요는 없었고, 난 너무 힘들었다. 그냥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엄마라도 있으면 오디오가 빌 일은 없어서 조금은 나았지만, 좀 혼자 있고 싶었다.


“된장찌개 차려뒀어. 먹고 들어가.”


아빠의 말은 단호했다. 본인이 한 된장찌개도 아니었지만, 저녁을 먹고, 아빠가 심야뉴스를 다 볼 때까지 앉아있으라는 것이 그의 요구였다. 내가 가끔 저녁을 먹었다면서 방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는 방에만 틀어박혀있는 딸이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본인도 일을 그만두면서 거실에서만 살고 있었지만, 아빠는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아빠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거실에 있지 않는 게 아빠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무신경함과 이중성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엄마에게는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난 엄마도 아빠의 답답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쉬는 날만 되면 누군가와 전화를 하면서 아빠의 험담을 뱉었다. 난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그 때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말하는 건 진짜로 너를 사랑해서라고, 너도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평소에는 아빠 욕을 그렇게 하던 엄마가 그 순간만큼은 아빠를 보호했다.


난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엄마가 될 생각이 아예 없는데, 그럼 난 아빠의 사랑을 알 수 없는 것일까. 솔직히 상관없었다. 아빠는 딸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최선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했다면 딸에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단어를 사용할 지부터 신중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나는 애초에 지금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아빠를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물론 사랑은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은 멀고 무겁고 너무 고급스럽다. 우리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일상적인 감정은 불편함, 안락함, 짜증, 즐거움과 같은 것들이다. 아무리 사랑이 존재한다고 해도, 평소에 사랑이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미 아빠와 나는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 불편함에 적응해서 별로 그것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빠의 말을 듣고 부엌에 앉아 밥을 먹는 이유는 순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별개로 나는 그들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왔다. 적어도 아빠는 아빠가 날 키우기 위해서 모든 인생을 갈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을 한 사람은 엄마고, 내 밥을 만든 사람도 엄마였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무게감으로 인해 나는 이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실직 후 매일 새벽에 들어오면서도 내가 먹을 요리를 만들고 집안일을 하던 엄마,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집안일을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한 엄마, 그리고 손에 물을 묻히면 큰일이 난다고 믿으면서도 10년동안 딸 저녁밥을 냉장고에서 꺼내는 아빠, 매일 신문에 구인칸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아빠, 하지만 한 번도 가족들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는 아빠. 그게 우리 가족이었다. 난 된장찌개를 한 입 떴다. 찌개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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