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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Feb 14. 2022

민주적인 좀비 (7)

우리가 마트에서 만난 다음 날, 사회에는 부유병이 생겼다. 좀비들이 하늘을 채우기 시작했다. 세상은 패닉이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긴 좀비들 때문에 안전사고가 발생했고, 중요한 일을 하다가 부유병에 걸린 사람들로 인해서 발전소, 학교, 도로는 마비되었다. 지금은 좀비가 생겨도 큰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이 짜여졌지만, 첫 날에 그런게 될 리가 없었다.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유력인사의 부유병 확진소식이 계속 나타났고, 핵심시설에 생긴 부유병 환자의 처리를 위해서 군인과 경찰은 뛰어다녔다. 대응해야 할 일이 계속 생겼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 시점에 요구르트 아줌마나 다니는 육교에 생긴 좀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지현이는 부유병이 생긴 첫 날, 자신이 사고를 당한 그 육교에서 하늘을 보면서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지현이는 그대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지현이의 엄마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현이가 부유병에 걸리자 지현이의 엄마는 사라졌다. 정규직이었던 것도 아니고, 신용카드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핸드폰은 있긴 했겠지만 주변에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통화기록을 통해서 그녀를 찾을수도 없었다. 애초에 지현이 엄마를 찾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학교에서만 세금을 내기 싫어서 도망갔다, 자살을 했다,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 있다는 소문들이 잠시 돌았을 뿐이었다. 애들은 지현이의 일을 안타까운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다. 그치만 지현이 얘기는 요즘 날씨가 습하다는 이야기와 다음주에 느와르 영화가 개봉한다는 이야기 사이에 잠깐 스쳐지나갔다. 지현이를 신경쓰는 사람은 그녀의 할머니뿐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성치 않은 다리로 매일 육교에 와서 지현이를 물끄럼히 바라봤다.


할머니는 지현이를 위해서 장례식을 하고 싶어했다. 할머니는 지현이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부유병에 적응할 때가 되자 거리에는 너무 많은 좀비가 있었고, 부유병 환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데에는 너무 많은 돈이 들었다. 환자들은 그들을 건들거나 옮기려고 하면 발광을 하면서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그들을 장례식장으로 옮기고 관에 넣는 일을 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고로움이 들어갔다. 좀비답게 그들은 어떤 마취제에도 잠들지 않았다. 부유병 환자를 모시는 유일한 방법은 두꺼운 방호복을 입은 채로 그들에게 계속 어깨를 물리는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었고, 그건 당연하게도 상당히 비쌌다. 그들을 이동시킨다고 해서 돈이 나가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소독제와 여러 공기청정기가 있어야 했고, 왔다갔다하는 손님들에게 부유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의약품을 제공해야 했다. 행사 중간마다 소독을 하는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는 공짜가 아니었다. 물론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 이러한 조치를 하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소독을 하는 티를 내지 않고서 장례식을 하면,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 애초에 충분한 돈을 내지 않으면 업체는 좀비를 위한 장례식을 해주지도 않았다.


장례식 문화는 금새 바뀌었다. 부잣집의 장례식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여전히 손님을 불렀고 3일장을 했다. 손님을 부를 수 있다는 건 부유하다는 증거였다. 하다하다 육개장이 부의 상징인 시대가 왔다. 평범하지만 찾을 수 없는 중산층은 장례식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수습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관에서 쉬게 하는 행위, 화장을 하는 행위를 통해 그들은 가족에게 마지막 예의를 했다. 빈곤층 가정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냥 정부에서 자신의 가족, 친구, 애인을 챙겨주기를 기다렸다. 다만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계속해서 부유병 환자가 생기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부유병을 걸린 사람을 챙길 정신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는데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보이는 부유병 환자는 가난과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 사회적 시선을 신경쓰는 사람은 길거리에 자신의 가족이 부유병에 걸려 둥둥 떠다녀도 아는 척하지도 못했다.


지현이의 생각을 하니까 속이 매스꺼웠다. 담배를 바닥에 대충 던졌다. 지현이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거나 슬프진 않았다. 그건 사고였고, 그 책임을 내가 다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지현이나 그 가족이 나에게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지현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애들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원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말하는 게 다른 사람들의 역할이었다. 난 그냥 아직 모를 뿐이었다. 왜 지현이가 하필이면 병이 생긴 첫 날 좀비가 되었을까. 왜 지현이의 표정은 그 때 그랬을까.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있었다. 그 문자는 ‘00기업 서류전형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2차 전형에 해당하는 면접전형은 다음주 수요일 11시에 진행될 예정이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눈이 트였다. 시야가 명확해졌다. 구역질은 사라졌고 상념도 없어졌다. 지현이와 부유병에 대한 생각 같은 건 이미 저 먼 과거의 일이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이 있다. 그건 소크라테스가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서 하는 소리였을 게 분명했다. 나는 삼겹살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르고 싶었고, 그 기회가 온 거 같았다.


무조건 합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현실적으로 내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서류전형 합격은 몇 년만에 처음으로 얻은 성과였다. 어떤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결과물을 얻은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별거 아닌 중소기업의 서류전형 합격이었지만,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떤 길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러한 길이 힘들고 피곤하고 잔혹하기 때문에 그 길에서 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길 위에서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난 남들이 다 가는 그 길에서 걷고 싶었다. 남들이 하는 걱정만 하고, 그들이 겪는 부담만을 느끼고 싶었다. 난 남들이 하는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의 합격은 너무 뿌듯했다. 그건 자격을 주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난 내가 앞으로 부유병에 걸려서 좀비가 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근거가 없는 생각이지만, 난 확신했다.

 

그 뒤부터 오후수업은 들을 만 했다. 교수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왔다. 저 말들 중에 면접에서 쓸만한 말이 있을까. 전공지식이 있는 걸 어필해야 할텐데 어떻게 하지. 면접관들은 과연 나한테 무슨 질문을 할까. 어려운 가정환경, 가난한 동네, 부모님의 직업, 이것들을 굳이 이야기하지 말까. 아니면 내가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왔다는 포인트로 이야기할까. 추악하지만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가공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내 증오를 삭제했고, 지금도 몸 안에 있는 무기력함에서 눈을 돌렸다. 나는 즐거웠다. 면접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내 인생을 그렇게 조정하며 나는 내가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상상에 빠졌다. 사고가 있기 전 지현이의 모습을 내게 대입시키면서 그렇게 나는 면접질문을 준비했다.


부모님에게는 면접을 보기로 했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않았다.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떨어졌을 때 괜히 더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패악질과 아빠의 한숨 중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했지만, 집 상태를 보고 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집 거실은 이미 엄마가 이것저것 집어던진 물건들로 난장판이었다. 깨진 접시, 부러진 젓가락, 찢어진 신문, 어디서 나온지도 모르겠는 플라스틱들 때문에 거실에서 맨발로 걷는게 어려워보일 지경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낸 사정은 정당할 것이다.


아마 아빠가 경비 일자리를 거절했기 때문이겠지. 10년 전부터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힘들게 지내고 있으면서도 아빠는 한 번도 경비나 일용직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지내온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는 것이 요지였다. 물론 그런 의사의 표시도 직접 한 건 아니었다. 엄마가 이런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으면, 그냥 신문을 크게 펴면서 헛기침 한 번 하는게 전부였다. 거절의 전부였다.


집안일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하는 집안일은 취업준비를 하는 딸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빠의 입장에서는 딸의 취업과 관련된 일이니까 특별히 하는 집안일이다. 물론 그 저녁은 엄마가 미리 요리해 둔 음식으로 차린 것이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건 악의나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가족에게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체면 때문에 특정 종류의 일을 절대 하지 않는 것도 그냥 처음부터 그랬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어떤 물건을 부셔도 아빠는 그것을 절대 치우지 않았다. 그냥 잔해가 널려있는 거실에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그곳으로 자리를 바꿀 뿐이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부모님이 유일하게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짱박혀서 이 모든 폭풍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서 주말 내내 집은 그런 상태였다. 친정으로 간 엄마가 마음을 다스리는 시점까지 그냥 집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내 방에서 면접을 준비했다. 취업을 한다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정확히 무엇이 어떤 방향으로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달라지긴 할 것이었다.


난 고개를 공책에 쳐박았다. 면접은 곧이었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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