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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k Aug 23. 2024

홍콩 저승 문이 열리는 날

Hungry Ghost Festival; 우란절; 중원절

친구들과 홍콩으로 여행을 갔을 때 술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밤길이었는데 거리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봤더니 “귀신 밥 주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호텔로 돌아가는 거리에 피어오르는 연기들이 어딘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세월이 흐르고 홍콩에 살면서 그때가 음력 7월인 우란절(盂蘭節, Hungry Ghost Festival) 기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우란절(盂蘭節), 도교에서는 중원절 (中元節)이라고 부르는 이 행사는 한국의 백중(百中) 또는 영화 코코에 나왔던 죽은 자(망자)의 날(Día de Muertos)과 비슷하다. 저승의 문이 열리고 돌아가신 조상과 떠돌이 영혼들이 이승으로 올라온다는 음력 7월은 귀월(鬼月)이라고 불리고, 이 '귀신의 달'의 절정인 음력 7월 15일에는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음식과 물건을 제물로 바치곤 한다 (우란절의 영어 이름은 Hungry Ghost Festival이다).

올해 '떠돌이 영혼들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날'은 8월 17일이었다.



이 음력 7월 15일에는 영혼들이 이승에서 배고프지 않고 저승에서 쓸 수 있도록 음식을 바치고 향을 피우고 저승 은행(?)에서 발행된 종이돈이나 집을 만들어서 태우는데, 이러한 종이로 만들어진 각종 공물을 광동어로는 찌잣(紙紮) 또는 영어로 Joss Paper라고 한다.

예전에야 집 앞, 거리 곳곳에 불을 놓고 찌잣을 태웠다지만, 요즘은 화재위험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골목 한 구석에 놓인 드럼통에서만 태울 수 있어서 아쉽게도 온 거리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이색적인 풍경은 찾기 어렵다.

People burn paper offerings and incense to appease the ghosts. Photo: SCMP (left), May Tse (right)


로컬 동네나 재래시장(wet market) 근처에 가면 이런 찌잣을 파는 가게는 한 두 곳씩 보이는데, 홍콩섬 싸이잉푼(Sai Ying Pun) 역 근처에는 아예 찌잣 상점이 모여있는 거리가 있다.


Sai Wan Joss Paper Street

138 Queen's Rd W, Sai Wan (上環皇后大道西138號)

3 minutes from Sai Ying Pun Station Exit A1


길을 가다가 이런 찌잣 상점이 보이면 한 번쯤 들어가서 구경해 보는 것도 색다를 것 같다.

Photo: Joshua Lin Yuet (left), SCMP (right)

예전부터 옷과 자동차, 집, 음식 같은 찌잣은 있었다지만, 찌잣 종류도 시대에 맞게 많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패드, 아이폰(아쉽지만 갤럭시는 못 봤다), 맥북, 각종 명품 백 장신구 그리고 안마의자와 드론, 코로나 시대에는 마스크와 손소독제 세트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찌잣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가끔 어린 영혼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아기 옷 찌잣을 보면 마음 한켠이 짠해진다.

(좌부터 우) 신발, 전화, 옷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 되었다. Photo: SCMP
(좌부터 우, 상부터 하) 딤섬, 코로나 방역 세트, 여성용 가방 & 구두, 남성용 정장, 명품 가방, 마작세트
여성용 외출 세트 (아이폰, 시계, 귀금속, 안경, 지갑, 벨트 등) Photo: SCMP


우란절에는 귀신들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들도 엄청나게 많은데, 예를 들면

좁은 골목으로 다니지 않기 (avoid alleys)

누군가 부른다고 고개 돌려서 뒤돌아보지 않기 (do not look back)

밤늦게 혼자 다니지 않기 (avoid darkness)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말기 (say no to new beginnings)

빨간색과 검은색 옷 입지 말기 (wardrobe woes avoiding red and black)

숫자 4 되도록 쓰지 말기 (do not use the number four)

밤에 옷을 밖에 걸어두지 말기 (do not hang clothes outside at night)

벽에 너무 붙어서지 말기 (귀신이 벽을 안고 있기 좋아한다나...) (do not stand close to the walls)

벌레 잡지 말기 (조상이나 영혼이 나방, 나비의 형태로 방문할 수 있으니 함부로 후려치지 말기) (do not swat the insects)

바다에서 혼자 수영하지 않기 (이건 평소에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게…) (do not swim alone in the water)

등등이 있지만… 별로 지키면서 생활하지는 않았다.

귀신들도 말 안 통하는 외국인들은 좀 봐주지 않았을까?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홍콩에서 골목으로 안 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 이 우란절 무렵이 되면 같이 점심 먹으러 나간 동료들이 골목마다 뒤에서 이름 부르고 돌아보면 귀신이 불렀다고 낄낄(?) 대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우란절의 홍콩에는 다양한 행사들과 함께 화려한 가설무대들이 설치되어 월극(越劇)의 야외공연도 볼 수 있다. ‘월극’은 광동 지역의 전통극으로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로 잘 알려진 북경의 전통극인 ‘경극’(京劇)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구룡시에 있는 큰 공터(Carpenter Road Park, Kowloon City)에서는 해마다 Hungry Ghost Festival이 크게 열리니 이 시기에 홍콩을 방문하면 재미 삼아 한 번 들려봐도 좋을 듯하다.

Photo: SCMP (left), Edmond So (right)


그나저나 2016년인가 구찌(Gucci)가 홍콩의 찌잣(紙紮) 상점주에게 상표권 침해에 대한 경고장을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소셜과 미디어에서는 "구찌는 저승에도 지점 내려는 거냐 (Does Gucci want to open branches in the underworld?" 등 말도 탈도 많았고, 찌잣 상점에서 구찌 물건은 거둬들였지만...

오늘날에도 루이비통, 입생로랑, 버버리, 뉴발란스 등 다른 브랜드 들은 저승(?) 고객을 대상으로 성황리에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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