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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k Aug 30. 2024

홍콩을 강타한 태풍

T10 망쿳이 남긴 기억

바야흐로 태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홍콩은 6월부터 10월까지 꾸준히 태풍이 오지만, 역시 습도가 가장 높은 8월부터 10월까지 큰 태풍이 잦은 편이다.


홍콩의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아서 태풍의 영향권에 있는 시간은 짧은 편이지만, 항구 도시 특성상 태풍에 대비하는 시스템은 꽤 체계적이다. 한국의 태풍 경보가 단순히 주의보와 경보로 나뉘는 것과 달리, 홍콩은 다양한 단계의 태풍 경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홍콩의 태풍 경보는 T1에서 시작해서 T3, T8, T9, T10으로 진행된다. (나머지 중간 숫자는 큰 의미 없이 혼선만 준다는 이유로 1970년대 없어졌다고 한다)


홍콩 사람들은 큰 태풍이 온다고 하면 일기예보를 시시각각 예의 주시한다. 태풍 경보 단계에 따라 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T8 경고가 발령되면 학교는 물론 모든 회사와 상점들은 문을 닫고 대중교통도 운행을 멈춘다. 관광객이라면 소중한 하루를 통째로 숙소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강한 태풍이 홍콩을 강타하면 그전까지는 이국적인 풍경이라 여겼던 빼곡한 거리의 간판들이 위험한 흉기로 돌변하는 것은 물론 수십 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 같은 아름드리나무들도 뿌리째 뽑혀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태풍 경보에 따른 가이드라인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진다.

태풍경보 (Typhoon Warning Signals)

* T1 - 태풍이 800km 반경 이내 접근 - 일상생활에 지장 없음
* T3 - 풍속 시속 41-62km - 일상에는 큰 지장 없지만 선박 운행 취소 가능 ***정크보트 취소 가능
* T8 - 풍속 시속 63-117km와 호우 - 보통 2시간 전에 T8 예비령 발령. 휴교/휴무, 공공/야외시설 폐쇄, 대중교통 중단
* T9, T10 - 집 또는 숙소에 머물러야 함. 휴교/휴무, 공공/야외시설 폐쇄, 대중교통 중단

 



직장인들의 기대(?) - T8의 휴무

여름이 시작되면 사무실에서는 은근히 "올 해는 몇 번이나 T8이 발령될까" 하는 기대 섞인 이야기가 오간다. 홍콩에서는 T8 경보로 인한 휴무나 휴교는 직장인들에게는 일종의 '보너스 휴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쉬는 날이 되지는 않으니,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다.


오전 7시 이전에 T8이 발령되면 휴무/휴교가 확정된다. 하지만 정오 이전에 T3로 떨어지면 오후에 출근하거나 등교해야 한다.

반대로 정오 이후까지 T8이 유지된다면 (비록 12시 5분에 T8이 해제되더라도) 그날은 전일 휴무/휴교가 된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TV, 라디오 뉴스, 기상청 앱을 주시하며 '조금만 더 힘내'라는 심정으로 태풍을 응원한다.


그러나 태풍 경보가 오전 7시 이후에 발령되면 꽤 골치 아픈 상황이 펼쳐진다.

학생들은 이미 등교했고 직장인들은 출근한 상태에서 T8 예비령(2시간 이내 T8 경보가 발령될 것이라는 안내)이 뜨면, 아이의 학교에서는 급히 데리러 오라는 연락이 오고, 상점들은 서둘러 문을 닫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비까지 쏟아진다면, 택시나 우버 잡는 건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어지고, 대중교통은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이 사정을 모르는 여행객들은 하나 둘 문을 닫는 상점과 쇼핑몰을 보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리둥절 당황하기 일쑤다.


물론 홍콩은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보통 반나절도 안되어 태풍이 지나가지만, 홍콩에 살거나 여행 중이라면 태풍에 대한 정보는 늘 주시하는 것이 좋다.

태풍과 같은 기상 상황에 대한 정보는 홍콩 사람이라면 모두가 설치하는 홍콩 기상청 앱(HKO)에서 확인할 수 있다. Apple iOS 또는 Android에서 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으니 홍콩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꼭 챙겨두자.


그렇게 몇 번의 T8을 겪으며 겁을 내던 시기도 지나고 태풍이 가져다주는 보너스 휴무도 즐기면서(?) "이 또한 홍콩생활의 일부려니" 하고 적응할 무렵, 상상을 초월하는 T10을 연달아 겪었다.




T10의 공포 - 망쿳(Mangkhut, 망고스틴)

홍콩에서 최근 발령된 T10 태풍 중 하나인 망쿳(2018, 과일의 여왕이라는 '망고스틴'의 태국어 명칭)은 이름과 달리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폭풍은 밤이 돼도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집들은 유리창이 깨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심지어 변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바닷가에 인접한 건물에는 높은 파도가 건물 안까지 밀려 들어왔고, 공사장에서는 홍콩의 상징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대나무 비계(scaffoldings)가 무너져 내렸다.


나 역시 남편과 밤새 강한 비바람에 유리창 배수구로 들어오는 물을 닦아내느라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우리 집 꼬맹이는 "우리 집에 분수가 생겼다"며 신나 했다.


집 안에 있어도 섬뜩한 바람 소리가 계속 들렸다.

자연의 위대함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낀 날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근처에 사는 직장 동료에게서 영상이 도착했다.  




회사가 CNN에 나왔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어서 강풍을 직격으로 맞았는지, 우리 사무실 건물의 유리창은 전부 깨졌고 온갖 서류와 비품들이 건물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랩탑 챙겨 와서 다행이네. 그런데 혹시 책상에 계약서 올려놨던가?"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이 장면은 이후 홍콩을 강타한 태풍 '망쿳'의 위력을 보여주는 자료로 전 세계 CNN에 보도되었고, 덕분에 해외 파트너들로부터도 걱정 어린(?) 안부 연락을 받았다.

- 홍콩 태풍 엄청나다던데 괜찮아? 어떤 건물은 유리창 다 깨졌다던데?

- 어, 그게 우리 회사 건물이야.


이 날의 태풍은 홍콩 역사상 최악의 태풍 중 3위를 차지했다.


거리에는 유리 파편이 널려있어 며칠 동안 학교는 문을 닫고 놀이터는 폐쇄되었다. 출근길에 마주한 풍경은 어제까지 내가 알던 거리와는 달랐다. 수십 년 된 나무가 뿌리째 뽑힌 걸 보면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나약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은 거리보다 더 난리였다.

내 자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위치였는데, 영상을 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창문이 모두 깨져 마치 살인사건 현장처럼 테이프 하나만 덜렁 붙어 있는 걸 보니, 가까이 갔다간 진짜로 폴리스 라인이 쳐지겠구나 싶었다. 퇴근길에는 유리 조각들이 찻길에 가득해, 조명이 반사된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반짝하니 참 예쁘다는 생뚱맞은 생각마저 들었다.





태풍의 전조 증상?

당신이 홍콩에 있는데 거대한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슈퍼마켓에 갔는데 라면, 국수, 야채, 과일 코너가 텅텅 비어있다면 그건 태풍이 오고 있다는 전조증상이다. 남은 물건이라도 빨리 사놓자.

텅 빈 라면 매대 구석에 불닭볶음면은 아직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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