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신앙, 풍수, 그리고 일상 속 이야기
예로부터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 덕분에 일찍부터 항구가 발달한 홍콩에서는 지금도 무속신앙이 일상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는 현대적인 홍콩에서도 전통적인 가치로서 홍콩 사람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홍콩의 사원과 신앙
홍콩 전역에는 약 600여 개 사원이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맘모사원'(文武廟)과 '웡타이신사원'(黃大仙祠)이 유명하다. 많은 홍콩 사람들이 이 곳에 들러 길흉화복을 점치고 향을 올리며 복을 기원한다. 이 사원들은 도교, 불교, 유교의 다양한 신과 신격화된 인물들을 모시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신이 바로 '틴하우'(天后 천상의 황후)다.
틴하우는 거센 파도로부터 어부와 배를 지켜주는 바다의 여신으로 마조(媽祖) 또는 아마(阿媽)라고도 불리는데, 항구 도시 홍콩에 많은 틴하우 사원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홍콩 전역에 60여 개가 넘는 틴하우 사원이 있고 음력 3월 23일에는 틴하우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도 성대하게 열린다.
재미있는 사실은 긴급한 상황에서 구원을 요청할때 '틴하우(천상의 황후) 도와주세요'라고 부르면 황후 격식에 맞춰 이것 저것 차려입고 몸단장하고 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급할 때는 잊지 말고 좀 더 친근한 이름인 ‘마조(媽祖)’라고 불러야 빨리 도착한다고 하니 명심하자. 혹시 홍콩 앞바다에서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꼭 ‘마조‘를 찾자!
풍수와 홍콩의 일상
홍콩에서 풍수지리는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많은 홍콩 사람들이 집을 선택하거나 사무실을 구할 때, 그리고 도시 건축물을 세울 때도 풍수를 고려한다. 홍콩의 고층 건물 사이에 풍수 원칙이 적용된 사례는 꽤 흔하다.
센트럴에 있는 '중국은행 (Bank of China)' 건물이 칼을 닮아 살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주변 건물들이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풍수 전문가를 불러 조치를 했다느니, HSBC 본사는 그 건물 방향으로 대포와 같은 크레인장치를 설치해서 나쁜 기운을 막는다는 이야기나 리펄스 베이에 있는 한 아파트가 용이 바다로 가는 길을 막지 않기 위하여 건물 가운데를 뻥 뚫어 설계했다는 이야기도 역시 유명하다
특히 도심 재개발이 있을 때, 예를 들어 침사초이나 센트럴 같은 지역에서 도로 건설이나 재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풍수 전문가가 기운의 흐름이 방해받지 않도록 설계를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홍콩에서는 이사나 회사 이전 때에도 풍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일이 일반적이다. 이사할 날짜와 시간도 길일을 택하고, 침대, 책상, 가구 배치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내부 가구 배치 역시 중요한데, 책상은 문을 등지지 않도록 하고, 침대는 창문이나 문과 마주하지 않게 배치하는 게 원칙이다. 물과 바람의 흐름도 중요하다. 물은 재물을 상징하고, 바람은 기운이 흐르게 한다. 이러한 원칙은 특히 금융권에서 많이 신경을 쓰는 듯 한데, 홍콩의 은행이나 부동산 회사들은 풍수에 맞춰 인테리어를 조정하여 금전운을 높이고 고객 신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한편, 건물의 입구와 복도는 기운이 들어오는 길목으로 너무 좁거나 어두우면 나쁜 기운이 몰려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쿤통에 있는 PCCW 본사 앞 거대한 금사자장도 풍수 전문가 조언에 따라서 번영을 가져다 주는 의미로 세웠다고 했다 (2023년 건물주가 바뀐 건지 회사 오너가 마음이 바뀐 건지 철거했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8층-13층을 사용했는데 내부 공사를 하면서 사무실을 13층에서 8층으로 옮기게 되었다. 13층에서는 쇼핑몰과 아파트가 보이는 창가에 파티션으로 내 공간이 있었는데, 8층으로 내려가니 하버가 보이는 (뷰는 너무 좋아졌다) 자리인데 파티션은 풍수적으로 설치가 불가능하다며 책상을 2개 붙여서 묘한 배치를 만들어 주었다. 내 자리 뒤에는 화분도 하나 갖다 놨는데 풍수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더라.
아직도 유용한 홍콩의 일력(日曆)
예전에는 우리도 얇은 종이를 매일 매일 한장씩 뜯어내는 일력을 썼었다 (급할 때는 화장실 휴지 대용으로도 사용가능하다고 들었었다). 한국에서는 이제 ‘일력’은 레트로한 인테리어용 소품으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홍콩에서는 매년 연말이 되면 ‘일력’을 여전히 많이 팔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거의 사라진 일력이 홍콩에서는 이사나 결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날을 잡을 때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홍콩의 일력에는 단순히 날짜를 넘어서 띠별 운세,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방위나 시간대에 따른 길흉화복까지 주역에 나올 것 같은 모든 점괘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이벤트는 이 일력을 참고해 가장 좋은 날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
이 일력을 여행 중에 보게 된다면 기념품으로 하나쯤 사오는 것도 좋을 만한 아이템이다. 영어로 된 일력도 있다고 하여 홍콩 떠날 때 찾으러 다녔는데, 이게 워낙 시즌상품이다 보니 연말이 아니면 찾기 힘들어 결국 못 사와 아쉽다.
아주 특별한 줄자
풍수와 관련하여 내게 가장 흥미로운 물건 중 하나는 바로 풍수 줄자였다. 겉모습은 평범한 줄자처럼 보이지만 줄을 당기면 길이와 함께 각종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롯한 각종 점괘와 죽을 사(死) 같은 무서운 글자들이 표시된다.
풍수를 철저히 따르는 일부 홍콩 사람들은 가구를 살 때 ‘파묘’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쓸 것 같은 이 줄자(실제로 한국의 지관들도 쓴다)로 가구의 각 면의 길이를 재고, 그렇게 산 가구를 집에 가지고 와 풍수에 맞는 방위에 배치한다. 당연히 가구 색깔도 풍수에 따른다.
"이 식탁은 못쓰겠어,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어."
이 줄자가 있으면 식탁 길이를 재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