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칠리"와 "와사비"
홍콩에 살면 한 번쯤은 독특한 영어 이름으로 소개하는 홍콩 사람을 만나게 된다.
홍콩 회사에서의 첫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칠리(고추; Chili)예요”
뭐지? 이 회사는 닉네임을 쓰나?
알고 보니 그건 평범한(?) 홍콩 로컬의 영어 이름이었고, 이후 난 '와사비(Wasabi)'라는 인사팀 직원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다들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오래된 영국의 식민지 경험과 다국적 기업이 많이 진출한 홍콩의 특성 상 영어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콩의 유명인 중 'Leslie Cheung (장국영)'이나 'Tony Leung (양조위)'처럼 평범한 영어 이름을 쓰는 사람도 많지만, 영어권에서는 쓰지 않는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이름을 많이 쓰기도 한다.
미국의 커뮤니티 사이트 Reddit에서는 종종 "나 홍콩에서 이런 이름도 들어본 적 있다"를 주제로 '누가 누가 더 신기한 이름을 들어봤나' 배틀이 벌어지기도 한다.
'피아노 (Piano)', '단백질 (Protein)', '재시작 (Restart)' 같은 이름도 있지만, 가장 감탄했던 이름은 성이 'Mak'씨여서 이름을 'Apple'로 지은 '애플 맥 (Apple Mak)'씨 였다.
대체 홍콩은 어쩌다가 이런 독특한 영어 이름 문화를 가지게 된 걸까?
이런 기상천외한 영어 이름도 내키는 대로 짓는 게 아니라 나름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음식, 명품, 동물 등 좋아하는 물건
애플(Apple), 체리(Cherry), 망고 (Mango), 크림 (Cream), 초코렛 (Chocolate), 수플레(Soufflé)' 같은 음식 이름은 기본이고, 동물 이름으로는 스쿼럴(Squirrel), 키티(Kitty), 히포(Hippo), 버드 (Bird), 웨일(Whale). 콤마 (Comma), 써클(Circle), 앵글 (Angle) 같은 기하학 도형이나 아우디 (Audi), 샤넬(Chanel), 에르메스(Hermes), 구찌(Gucci) 같은 브랜드명을 이름으로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자 이름의 뜻을 따 온 이름
홍콩의 유명한 영화 감독 중 '푸르트 챈'이라는 감독이 있다. 한글로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저 '푸르트'가 과일 Fruit 이었다.
이 '과일' 감독님의 본명은 陳果이었고, 과일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 '과(果)'를 살려서 영어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만일 파이어(Fire)나 피쉬(Fish)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의 한자 이름에 불 '화(火)'나 물고기 '어(魚)'가 들어있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위의 두 이름 모두 실제로 홍콩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감독과 배우의 이름이다.
남자 이름 중에는 이름 끝에 '맨(man)'을 붙이는 ‘맨’시리즈가 눈에 띄기도 한다. 롱맨(Longman), 리치맨(Richman), 로맨(Lawman), 웰맨 (Wellman), 맨맨 (Manman) 등... 슈퍼히어로가 유행했을 때 따라 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름에 '문(文)'이나 '민(民)' 같은 한자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가 많다고 하더라.
귀엽거나 멋져 보이는 어미를 뒤에 붙인 이름
일본식 이름으로 맨 뒤에 '키'나 '코'로 끝나는 이름도 있는데, 실제 사용하는 일본이름인 유키 (Yuki) 뿐 아니라 스키 (Suki), 핑코 (Pinko), 미코 (Miko), 윈코 (Winko) 같은 이름이 귀엽다 생각해서 여자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좀 더 특별하게~ 남들이 안 쓸 만한(?) 독특한 이름
일부러 흔한 이름을 다른 스펠링으로 쓴다든지, 지역 특유의 발음 실수도 이름 철자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핸리(Henry) 대신에 한리(Hanry), 한리(Hanley), 캘빈 (Calvin) 대신에 카빈(Kavin), 칼빈(Kalvin) 등이 있다.
또한 '굳이 이걸 이름으로 쓴다'고 싶게 눈에 띄는 독특한 이름을 고르는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데빌(Devil)', '클로로필(Chlorophyll)', '머니 (money)’, ‘인터넷(internet)’, ‘비올란테(Violante)', '킨키(Kinky)' 같은 이름이다.
어떤 업계 내에는 비슷한 이름들이 유행하기도 하는데, 법조계 쪽에서 만난 독특한 이름으로는 매그넘 (Magnum), 존 배프티스트(John Baptist), 루드비히(Ludwig), 이그나티우스(Ignatius) 등이 있었다.
이렇듯 홍콩 사람들 대부분은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공식 신분증(HKID)에는 중국어 이름만 표기되자만 학교나 회사에서는 대부분 영어 이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영어 이름을 짓고, 때로는 풍수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홍콩 사람들이 이런 독특한 영어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로는, 보통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학교에서 영어 이름을 정하는데, 반에서 다섯 번째 마이클이나 일곱 번째 엘리자베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 나이의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영어 단어들이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름 중 너무 이상하다 싶은 이름은 나이가 들거나, 환경에 따라 바꾸기도 한다.)
또 다른 재미있는 점은 홍콩 사람들은 가족끼리는 주로 중국 이름을 사용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
그래서 종종 회사의 공식 문서에 표시된 한자 이름을 보면 몇 년을 함께 일한 팀 동료라도 'Leung Chiu Wai? 이게 누구야? 아~ 이게 Tony 너 이름이었어?'하고 묻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영미 문화권 사람들은 '성(Last Name)'을 통하여 조상이 어떤 직업을 가졌었는지, 어디 살던 사람들이었는지 등등 자신과 자신 가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반면,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나 부모나 조부모, 또는 유명인 이름을 따서 짓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글자 하나 하나가 뜻이 다른 표의문자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성'보다는 '이름'의 뜻을 고민하고 정성스럽게 지어 개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홍콩에서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문화는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어찌 보면 홍콩 사람들의 영어 이름을 통해 개성과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좀 더 전통적인 방식의 작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영어 이름을 일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 사용했던 식민지 시절에는 대부분의 홍콩 사람들이 평범한 영국식 이름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영어 이름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기 위하여 개성있고 독특한 이름을 선택한다.
피아노 연주를 너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피아노 (Piano)'라는 이름보다 더 어울리는 영어 이름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이름들이 영미 문화권에 익숙한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홍콩에서는 영어가 다문화의 일부로 받아 들여지면서 동서양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깐 홍콩의 레스토랑에서 '메뉴 (Menu)'라는 이름을 가진 서버가 당신을 서빙한다고 해도 절대 놀라거나 비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흔적: 영국 식민지 시절에 영어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문화의 융합: 홍콩은 동서양 문화가 섞여 있어서 영어 이름을 쓰는 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영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하려고 이런 톡특한 이름들을 짓는다.
홍콩의 독특한 이름 문화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다. 장난스러운 영어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까지 나타낼 수 있는 창의력과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다문화 사회인 홍콩을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영어 이름을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홍콩 스타일로 당신의 창의력을 발휘해 보는 건 어떨까?
인생 역전을 꿈꾸며 '로또 (Lotto)'라는 이름을 쓴다면 정말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펼쳐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