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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k Nov 01. 2024

홍콩의 어두운 현대사를 간직한 '구룡성채'

‘마굴’이라 불리던 슬럼가에서 코스프레하는 공원으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홍콩의 구룡반도의 북쪽에 위치했던 ‘구룡성채’(광동어 까오룽쎙짜이/九龍城寨)는 흔히 ‘마굴’ 또는 ‘어둠의 도시’로 불려 온 홍콩의 대표적인 슬럼가였다.


이곳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홍콩에서 두 번째로 살았던 지역이 바로 이 '구룡성'(九龍城)이었고 우연히 아이와 함께 놀러 간 집 앞 공원에서 그곳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촬영된 구룡성채의 옛모습 (사진출처 : Government Records Service, Hong Kong)

이곳은 원래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시기, 홍콩과의 국경을 감시하던 청나라의 요새였다.

이후 1989년 베이징조약으로 영국이 청나라로부터 구룡반도 북쪽 신계를 99년간 추가로 조차 하면서 국경이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이 요새는 마치 대사관이나 외국 군부대처럼 청나라의 관할로 남겨져 ‘차이나 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이후 영국과 청나라가 이곳의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며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중국 내에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곧이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까지 일어난 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게 되면서 이곳의 운명은 더 꼬이기 시작한다.


일본군이 구룡성채의 앞에 있던 비행기 활주로(후일 홍콩의 옛 공항인 카이탁 공항이 되는 곳)를 확장하기 위해 성채의 성벽을 허물어 그 돌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성벽은 사라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당시 국민당 중국정부는 영국에 구룡성채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기에다가 아직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의 정치상황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친 불법 이민자들이 이곳에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종의 영토분쟁지역이 된 구룡성채의 무너진 성벽 위로 점점 늘어나는 이민자들을 위한 불법 건축물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영국과 갈라진 두 중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3자가 모두 이곳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영국이 혹시라도 생길 분쟁을 우려해 이곳과 이곳의 불법 이민자들에 대해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법도 행정력도 닿지 않는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67년 건물들이 올라가며 모양을 갖춰나가는 구룡성채(사진출처 : Government Records Service, Hong Kong)

1950년대 이후 중국에 커다란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불법 이민자들이 구룡성채로 몰려들었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지만 법의 손이 닿지 않았던 이곳을 당연하게도 홍콩의 범죄조직 ‘삼합회’가 지배하게 되었다.

구룡성채에서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마약, 매춘, 도박 그리고 불법 치과를 비롯한 불법 의료행위가 성행했지만 범죄자들만 이곳에 살았던 것은 아니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홍콩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은 주로 구룡성채 내부의 작은 공장들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처우와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당시 홍콩 사람들의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인 '어묵'의 80%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의 구룡성채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고립되어 거대한 슬럼이 되어버린 구룡성채 (사진출처 : Government Records Service, Hong Kong)

건물은 증축에 증축을 거쳐 점점 더 미로같이 복잡해지고 햇빛은 전혀 들지 않았으며, 낙후된 배수시설로 어두운 통로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바퀴벌레와 쥐가 온 건물에 돌아다니던 그곳에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가로 160m 세로 160m 정도의 이 공간(25,600 제곱미터)에 3만 5천 명에서 최대 5만 명까지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근처 카이탁 공항으로 인한 고도제한이 없었다면 건물들은 더 높이 올라갔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룡성채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사진작가 Greg Girard 와 Ian Lambot가 기록한 구룡성채의 모습들 (C)Greg Girard (C)Ian Lambot九龍寨城

1984년 영국과 중국이 홍콩의 반환을 합의한 ‘중영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중국의 동의 하에 구룡성채에 대한 홍콩정부의 본격적인 대책이 마련되었다.


1987년 철거가 발표되고 1991년에서 1992년에 걸쳐 주민들이 강제로 퇴거당했다. 1994년 철거가 완료되었고 이후 그 자리엔 옛 요새의 유적들이 일부 복원되어 있는 중국풍의 공원이 들어섰다.

공원을 만들며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구룡채성'(九龍寨城)이라고 쓰인 옛 현판이 발견되어 '구룡성채'가 아닌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되면서 지금의 공원이름은 '구룡채성공원'이 되었다.


여담으로 지금의 공원은 어쩐지 홍콩 코스프레인들의 성지가 되어 각종 게임 캐릭터나 애니 코스튬을 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1994년 철거당시 모습과 공원으로 조성된 현재의 모습 (사진출처 : Government Records Service, Hong Kong)

구룡성채가 보여준 슬럼의 충격적인 비주얼은 각종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철거 직전에는 성룡의 영화 <중안조>(重案組/1993)가 당시 비어있던 실제 구룡성채에서 촬영되었다.

이후 <추룡 Chasing Dragon>(追龍/2017)과 <구룡성채:무법지대>(九龍城寨之圍城/2024) 등 영화에서는 세트로 재현되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홍콩은 '이민자'들의 도시다.

언제나 중국의 정치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었고 그 이민자들의 값싼 노동력이 지금의 홍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영화 <첨밀밀>의 두 이민자 소군과 이교를 기억해 보자)


구룡성채는 단지 험악한 범죄의 소굴, 그로테스크한 빈민가로만이 아니라 격변의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지금의 홍콩을 일군 이민자들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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