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Park Apr 09. 2019

Jay의 캐나다 도전의 씨앗

좌충 우돌 캐나다 영주권과 취업 도전기

2018년 3월 매년 건강관리협회에서 건강검진을 하라고 문자가 휴대폰으로 도착하여, 아내와 함께 부산의 모 병원에 예약을 잡고 같이 방문했다. 아침부터 건강검진을 실시하는데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이들이나 다름없이 우리는 스티브 잡스가 전 세계에 IT 혁신(?)을 가져 온 스마트폰에서 각자 관심 있는 분야의 정보를 써핑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호주로 갈 수 있었던 내 자신이 돌이켜 보면 너무나 아쉽고 나이 50세가 되어갈 시점에 온 가족들이 이민을 갈 수 있었던 기회가 순식간에 날아갔기에 늘 내 머리 속에는 한국이 아닌 외국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사실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왔고 2006년부터 5년간 텍사스 주의 댈러스(DALLAS) 에서 해외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서 늘 동경은 미국이었다. 잠시 댈러스를 소개하자면 여름은 덥고 겨울은 꽤 추운 곳이었다. 나무도 사막 기후 성 나무들만 보이는 곳이었으나 제법 한인들이 10만명 정도가 모여 사는 미국 내에서도 그리 작지 않은 도시였다. 나는 주재원 생활을 했기에 경제적으로도 이민 생활을 하는 교민들 보다는 풍족했으며, 직장도 해고될 염려가 없었던 터라 미국 생활을 사실상 즐겼던 것 같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돈 있으나 없으나 이민 가기가 쉽지 않은 나라가 미국이었고 주재원 생활이 끝날 무렵에 미국에 체류하면서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하였지만 쉽지가 않았었다. 결국 미국 생활 동안 얻은 것은 우리 막내 녀석을 시민권자 자격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에서 태어나게 한 것이었고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 온 시기도 2011년 6월 이었었다.


서두가 길었으나 나는 아무래도 한국 보다는 타국에서 사는 것이 나의 성격상 맞지 않나 늘 생각했었다.

병원에 대기 중에 나는 검색 엔진을 통해 호주, 뉴질랜드 이민 관련 검색을 하고 있었다. 문득 뉴질랜드 이민 관련 정보가 눈에 띄었고 나의 전공인 Computer Science의 직종으로 이민이 가능하다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호주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정보를 접했으나 뉴질랜드는 나에게 생소했으나 내 전공을 살려서 가족들이 이민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때부터 이주공사가 주로 소개하는 이주방법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에게 넌즈시 뉴질랜드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였더니 아내도 생각보다 관심을 가지면서 한번 알아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주공사, 블로그, 현지 유학생, 이민준비생들의 이야기 들을 있는데로 읽기 시작했고 쉽지는 않으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역시 문제는 머니(Money) 였다.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머니보다도 더 난감하게 다가온 게 있었다. 검색 창을 통해 뉴질랜드 정보를 캐던 중 중년의 한 영주권자께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다가 그분께 쪽찌를 보내게 되었고 그분도 흔쾌히 카톡으로 연락을 주시겠다고 하여, 날짜를 잡고 그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1시간이 넘게 그분과 통화를 하게되었고 결론을 빨리 낼 수가 있었다.


"뉴질랜드는 오셔도 하실 수 있는 직장이 적고, 이력서를 아무리 내셔도 뽑힐 가능성은 5%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도 뉴질랜드에 멋도 모르고 와 1000개 가까운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으나 연락이 온 곳은 단 3군데 밖이었고 그 중에 한군데로부터 겨우 오퍼를 받고 일을 하게 되었고 뉴질랜드는 호주 대비 낙농업이 위주인 나라이기 때문에 IT 관련 직장이 많지 않고 직장을 구하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 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또다시 느낀 점은 이주공사에서 소개하는 방법은 그럴싸 해보이고 어렵지 않게 현지에 적응하여 이민이 가능하다고 떠벌이지만, 역시 장사속이라 믿으면 되지 않고 현지를 방문하여 실정를 조사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짧으나마 뉴질랜드에 대한 꿈과 기대를 접게 되었고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50세 나이에 전산관련업무를 할 수 있는 직장은 구할 길이 없고 봉급 또한 박봉이라 우리 다섯 식구가 먹고살려면 막노동이라도 해야하며, 내가 경험한 대리기사도 몸이 성하지 않으면 오래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 며칠 후 나는 이전에 미국이 이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었고 캐나다는 어떨까 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뉴질랜드에서 캐나다로 급선회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캐나다 관련 이민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캐나다는 나이가 젊고 학위가 있으면 비교적 쉽게 이민이 가능한 나라였으나 내가 알아보기 시작했던 나이도 거의 40세가 되어가던 시절로 나이점수도 거의 받지 못했고 독립이민, 기술이민 모두 점수가 부족하여 지래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나라였다. 캘거리에 내가 유일하게 캐나다에서 알던 미국에서 같이 대학교와 교회를 다녔던 친구 녀석이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페이스 북에 있는 친구 연락처를 급히 찾아보게 되었고 어렵게 페이스북을 찾아 친구 녀석에게 캐나다에 대해 물었다.


그 동안, 나는 캐나다 이민 공사의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고 한 이주공사에서 소개하는 밴쿠버 스시음식점 요리사로 일하면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아내에게 그동안 수집했던 정보를 공유를 하고 해당 이주공사와 약속을 정하였고 해당 날짜가 다가 오기 전 까지 계속해서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사실 인터넷에는 많은 정보가 올라가 있었으며 블로그나 현지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정보는 내게 한단어 한단어 머리 속에 들어오는 정보 들이었다. 그래도 전화 상담을 통해 캐나다로 조리사 이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안 것 만으로도 내게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나름 희망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당 이주공사와의 약속날짜가 잡혔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로 상경하였고, 그 이주공사 뿐만아니라 추가로 다른 2개 이주공사들과도 약속을 잡았다. 모 이주공사는 전화로는 아예 상담조차 해 주질 않아서, 리스트에서 지우고 그래도 조금이나마 친절히 대해주는 이주공사 위주로 골라서 예약을 했다.


드디어,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하였고 내 마음 속에는 어떻게든 캐나다로 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본인의 스토리는 현재 진행 중이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읽으시는 독자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고 개인적으로 질문이 있으신 분은 카카오톡 ID: jaehan16으로 연락 주시면 시간이 나는데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Jay의 긴 여정 전 고통의 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