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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Jun 25. 2020

그럼에도 ‘인간다움’

[도서 리뷰]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재앙과도 같은

전염병이 온 세계를 휩쓸고 그러한 팬데믹의 와중에 인류가 그 동안 쌓아왔던 사회 제도와 윤리, 체제 등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 각자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어 서북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류’와 ‘단’ 부부, ‘도리’와 ‘미소’ 자매, ‘지나’의 가족과 ‘건지’ 일행은 만나고 또한 헤어진다. 인간성이 없어지고 생존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젊은 작가

최진영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인류 문명의 종말 이후를 다루는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1960년대 이후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꾸준히 창작되며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영화들이 강대국들의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멸망하는 것으로 설정했다면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는 특이하게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문명이 멸망하는 세계관을 설정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코로나 대유행을 겪고 있는 2020년의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대체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문법은 살아남은 인류가 문명의 종말을 가져온 요인 또 그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한 채 생존만이 삶의 목적이 된 또 다른 인간 혹은 집단과 겪는 갈등을 정형화된 클리셰로 삼는다. ‘해가 지는 곳으로’ 또한 그러한 장르의 문법을 잘 따른다. 하지만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중심인물인 류와 지나, 도리 등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부세력의 공격을 언제 받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면 대체로 남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합리적인 작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다. ‘건지’ 정도가 중심인물 중 유일한 남성이지만 ‘건지’도 생물학적으로만 남성일 뿐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남성 캐릭터와 다르게 소극적이고 유약하다.




일종의 클리셰

파괴라고 볼 수 있는 이런 특이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최진영 작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특히 ‘지나’라는 인물이 작가의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보인다. ‘지나’는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이 언제든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특히 정체 모를 폭력집단에게 붙잡혀 성폭행과 강제 노역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휴머니즘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지나’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을 받을 수 없는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도. 약육강식 같은 짐승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도.




매우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 소설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 문체도 지나치게 짧은 문장을 사용하려는 듯한 측면이 없진 않았으나 읽는 동안 곱씹게 되는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구성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일단 소설의 개연성과 필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몰입이 힘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잘 알 수 있지만 치사율과 전파율이 높은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할 때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경을 걸어잠근다. 그런데 중심인물들은, 특히나 ‘지나’ 가족은 스무 명이 넘는 가족과 생필품을 태우고 실은 두 대의 탑차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울란우데라는 곳까지 간다. 도대체 러시아 국경을 어떻게 넘어간 것일까? 아니, 러시아 이전에 북한 국경은 어떻게 넘은 것인가? 물론 이 소설은 코로나가 대유행하기 이전인 2017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하지만 1947년에 출간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도 그려지다시피 전염성이 높은 질병이 창궐하면 가장 먼저 경계나 국경을 막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소설에서 이 질병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된 것이고 발병 이틀 만에 대한민국 내에서만 6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언급된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인간 대 인간, 집단 대 집단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작품의 주제가 전염병의 무서움이 아닌 이상에야 작중에서 그 부분을 계속 부각시킬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규모의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피해서 모국을 떠나 러시아까지 온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접촉하고 전염의 우려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전쟁이나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더 납득하기 쉬웠을 것 같다.

또 사소한 것일 수도 있으나 대화에서 큰따옴표를 다 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특유의, 온점과 반점 이외의 문장부호를 다 빼 버리는 서술 방식을 오마주하려고 했던 것일까? 작가 나름으로는 분명 의도를 갖고 서술한 것이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왜 그랬어야 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 소설을

짧게 평가한다면 주제와 문체는 훌륭하지만 구성은 아쉬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힘 있는 문체로 잘 표현하고 있으나 소설이 인물, 사건, 배경이 긴밀히 연결되고 조직된 한 편의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인과관계나 개연성 등을 고려해 좀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중간중간에 내용을 생략하고 서술자를 자주 교체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빈 부분이 많은데 그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빈 공간을 스스로 채우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내러티브의 부족함은 분명 아쉬운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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