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사수가 필요하다
퇴근하고도 재무회계 관련 강의나 유튜브 등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남들이 몇 년간 해온 공부와 일들을 흉내라도 내보자며 내내 공부에 시달렸다.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물론 대표님과 임원분들은 내가 이 쪽에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하고 싶다고 제안을 해주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난 모르는데 어쩌라고?'식의 태도는 내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었다. 회사에서의 위치도 있고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기대에 부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었다.
당장에 회계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정기주주총회 일정에 치여 일에 속도를 붙여야만 했다. 촉박한 일정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험이 있는 상무님께서는 처음이니만큼 나에게 정관이나 투자계약서등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주문하셨다. 그 어떤 것보다도 절차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투자사와의 계약사항에 사전에 동의를 구하거나 알려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철저히 지키고 그 결과물을 남겨놓아야 했다. 거기에 혹여나 안건에 등기사항이 있는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등기사항이 있으면 사전에 법무사님과 연락해서 관련된 서류 뭉치를 받아 이사님들과 주주분들이 오셨을 때 최대한 처리를 해야 했다.
보통 법무사에 사전에 일정과 안건을 알려주고 의뢰하면 이사회, 주총 의사록이나 공증필요시 관련 서류들을 준비해 주신다. 요즘에는 이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제공해 주는 업체들도 있는데 안건 등을 적어 넣으면 자동으로 의사록이나 각종 서류들을 생성해준다. 우리 회사는 법무사님이 있고, 법률 자문을 위한 법무법인 계약을 했기 때문에 이용은 못했지만 해당 부문에 경력직원을 채용이 어렵거나 법무사 비용이 부담이 되는 초기 스타트업이라면 이용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링크: 1등 주주 관리 서비스, ZUZU)
준비하면서 더 먼저 해야 할 건 주총 전에 이사회였다. 짧은 시간 안에 이사회와 주총을 모두 준비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이사회는 3명, 주총은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도였다. 소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회의는 그간 정말 수많이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떨렸다.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절차가 워낙 복잡했고, 위법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었으며, 회의 안건의 무게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더 힘들었던 건 회계감사를 하면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회계감사도 처음이라 헤매는 부분이 많았던 터라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에 그때 우리 회사는 TIPS 첫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거기에도 참여해야 했다. 물론 회계감사, 이사회 그리고 주총까지 준비할 게 많아 TIPS에 내 분량은 최소화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알게 됐다. 완전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서 내가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말이다.
정기주총과 이사회를 모두 잘 마무리하고 나니 기지개가 쭉 펴졌다. 이 마지막 절차를 위해서 연말마감부터 결산, 회계감사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루하루 정신이 어디가있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게 꿈만 같았다. 드디어 끝났다. 비상장법인에서 해봐야 몇 안되는 주주가 참석하는 것이었지만 잘 마쳤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과 긴장이 폭발해 퇴근하고 집에 와 완전 늘어져 버렸다.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경제시스템이 얼마나 정밀하게 설계가 되어있는지 알게 됐다. 하루하루 견고하게 짜인 그 틈새로 각자의 권리라는 무기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며 유기적으로 움직여 경제적 이익이 만들어진다. 이 모든 걸 지켜보면서 수많은 선택이 모여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간 경제공부에 소홀해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이걸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게 아쉬웠다. 좀 더 일찍 이 매력을 알았다면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것도 또다른 기획이니 꽤나 재미있었을지도?
요약 한 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평생 하라고 한다면...? 매력적인 일임은 확실하지만, 고민해 볼 일이다. 남은 평생이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 그래도 가능하다면, 처음 하는 일이었기에 좀 더 바싹 붙어서 일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수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