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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cialA Sep 18. 2023

08 기획자가 준비하는 첫 주주총회

나에게도 사수가 필요하다

사실 나는 굉장히 '주린이'였다. 입사 전까지는 주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주식회사라는 것에 대한 개념도 흐릿했다. 그 외에도 앞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수포자에 재무회계 쪽으로는 더더욱 문외한이었으니 사실 이 회사에 와서 나에게 가장 큰 도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퇴근하고도 재무회계 관련 강의나 유튜브 등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남들이 몇 년간 해온 공부와 일들을 흉내라도 내보자며 내내 공부에 시달렸다.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물론 대표님과 임원분들은 내가 이 쪽에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하고 싶다고 제안을 해주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난 모르는데 어쩌라고?'식의 태도는 내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었다. 회사에서의 위치도 있고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기대에 부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었다. 






당장에 회계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정기주주총회 일정에 치여 일에 속도를 붙여야만 했다. 촉박한 일정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험이 있는 상무님께서는 처음이니만큼 나에게 정관이나 투자계약서등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주문하셨다. 그 어떤 것보다도 절차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투자사와의 계약사항에 사전에 동의를 구하거나 알려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철저히 지키고 그 결과물을 남겨놓아야 했다. 거기에 혹여나 안건에 등기사항이 있는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등기사항이 있으면 사전에 법무사님과 연락해서 관련된 서류 뭉치를 받아 이사님들과 주주분들이 오셨을 때 최대한 처리를 해야 했다.


보통 법무사에 사전에 일정과 안건을 알려주고 의뢰하면 이사회, 주총 의사록이나 공증필요시 관련 서류들을 준비해 주신다. 요즘에는 이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제공해 주는 업체들도 있는데 안건 등을 적어 넣으면 자동으로 의사록이나 각종 서류들을 생성해준다. 우리 회사는 법무사님이 있고, 법률 자문을 위한 법무법인 계약을 했기 때문에 이용은 못했지만 해당 부문에 경력직원을 채용이 어렵거나 법무사 비용이 부담이 되는 초기 스타트업이라면 이용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링크:  1등 주주 관리 서비스, ZUZU)


준비하면서 더 먼저 해야 할 건 주총 전에 이사회였다. 짧은 시간 안에 이사회와 주총을 모두 준비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이사회는 3명, 주총은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도였다. 소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회의는 그간 정말 수많이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떨렸다.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절차가 워낙 복잡했고, 위법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었으며, 회의 안건의 무게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더 힘들었던 건 회계감사를 하면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회계감사도 처음이라 헤매는 부분이 많았던 터라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에 그때 우리 회사는 TIPS 첫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거기에도 참여해야 했다. 물론 회계감사, 이사회 그리고 주총까지 준비할 게 많아 TIPS에 내 분량은 최소화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첫 이사회와 주총은 아무래도 상무님께서 잘 이끌어 주셔서 잘 마쳤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나는 상무님 없이 혼자 이 과정을 모두 준비해야 했다. 처음으로 모시던 상무님이 퇴사하신 이후, 다음으로 모시게 된 상무님은 연구 쪽을 메인으로 하고 계셔서 이쪽은 거의 결정만 해주셨다. 이건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물을 수는 없었고, 이런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하는 게 좋으시겠어요? 하고 물을 수만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면 될까. 


이 두 가지는 일하는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차이인데, 모르는 걸 물을 수 없다는 건 내가 개념설명부터 전체를 다 설명드려야 하고 방향은 결정할 수 있지만, 개선사항에 대한 지적이나 오류를 검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엔 그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더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 더 꼼꼼히 조사할 수밖에 없었고, 개념정립까지 훨씬 더 많은 이론과 실제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1년 뒤 혼자 준비하게 된 건 훨씬 더 능숙해졌고 양식도 세련화했다. 어느 회사를 가든 새로운 양식을 계속해서 만드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이 회사에 와서도 모든 양식을 새롭게 다 만들어야 했다. 기획자 출신이 준비하는 주주총회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필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식순을 준비하고 PPT를 준비하면서 우리 회사가 작은 규모지만 그래도 직원들 개개인이 다 어벤저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회사의 내부인, 외부인이 모두 보는 자료이고 계속 남아있을 자료이기 때문에 내용면에서도, 양식이나 디자인 측면에서도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더 신경을 썼다.


거기에 그간 공부해 온 것도 전문성을 더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됐다. 지난 1년간 남편을 졸라 주식 계좌를 만들고 직접 투자에 나서면서 주식시장에 대해 간접적인 경험을 쌓았다. 남편과 내 앞으로 오는 각종 주식회사들의 주총 소집 통지서나 배당금 통지서 등등의 서류는 실무 공부에 큰 도움에 됐다. 그전엔 금액만 확인하고 버렸던 서류가 소중한 공부자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서류들에 밑줄을 쳐가며, 네이버에 상법 몇조가 뭐지, 검색해 가며 서류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봤다. 모르는 개념은 찾아보면서 공부하고 또 더 궁금한 건 자문변호사님이나 법무사님을 붙들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해댔다. 전문가 선생님들 덕분에 빠른 시간에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건 내겐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는 알게 됐다. 완전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서 내가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말이다. 






정기주총과 이사회를 모두 잘 마무리하고 나니 기지개가 쭉 펴졌다. 이 마지막 절차를 위해서 연말마감부터 결산, 회계감사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루하루 정신이 어디가있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게 꿈만 같았다. 드디어 끝났다. 비상장법인에서 해봐야 몇 안되는 주주가 참석하는 것이었지만 잘 마쳤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과 긴장이 폭발해 퇴근하고 집에 와 완전 늘어져 버렸다.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경제시스템이 얼마나 정밀하게 설계가 되어있는지 알게 됐다. 하루하루 견고하게 짜인 그 틈새로 각자의 권리라는 무기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며 유기적으로 움직여 경제적 이익이 만들어진다. 이 모든 걸 지켜보면서 수많은 선택이 모여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간 경제공부에 소홀해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이걸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게 아쉬웠다. 좀 더 일찍 이 매력을 알았다면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것도 또다른 기획이니 꽤나 재미있었을지도?



요약 한 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평생 하라고 한다면...? 매력적인 일임은 확실하지만, 고민해 볼 일이다. 남은 평생이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 그래도 가능하다면, 처음 하는 일이었기에 좀 더 바싹 붙어서 일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수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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