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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 Jan 17. 2023

밀크티

밤 10시, 이사 온 이곳에선 평온하고도 고요한 시간이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밤이 깊어갈수록 소음 역시 심해졌지만 지금 이곳에서의 밤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쉼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밤 10시가 그런 시간이었다는 걸 오랜만에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같은 아파트로의 이사였기에 그 어떤 이사보다 그다지 낯설 것 없을 것 같지만, 나는 리모델링을 시작할 때부터 위층 2세대와 아래층 2세대 그리고 앞집 이웃께 공사로 인해 발생될 소음에 대한 죄송함을 꾹꾹 눌러 담은 장문의 손 편지를 붙여 음료를 전했다. 그리고 리모델링 업체 사장님께 혹여나 민원은 없었는지  매일을 확인하고 살피었다. 오죽하면 사장님조차 "이제 시끄러운 것 다 끝났으니 괜찮아요 고객님." "컴플레인 있으면 제가 전달해 드릴 테니 이제 마음 좀 편히 가지세요." 이러실 정도였다. 인생 살며 별일 다 겪는다지만 반강제적으로 이사를 오게 된지라 그동안 살며 얻은 마음의 병 증상이 이리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무사히 리모델링을 마치고 드디어 이사하는 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는 코를 연신 훌쩍이게 만들었고 서글프고 분한 내 마음도 울컥울컥 들썩였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이사도 짐정리도 마무리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저층 창가에 앉아 예쁘게 내리는 눈도 감상했다. 소복소복 쌓이는 흰 눈을 보며 상처 난 내 마음에도 그 맑음을 가득 담아보았다. 참 이사 후, 다시 한번 이웃들에게 손편지와 롤케이크를 전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사하고도 한동안은 윗집의 발걸음 소리, 아이들 뛰는 소리가 심하게 들리면 이번에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가라는 생각에서 나는 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가.. 자책까지 불안이 날 집어삼킬 것만 같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노력하자 마음먹었다. 내 마음의 병이 생각보다 깊었구나 깨달으며 하루하루 조금씩 그저 비워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를 '그냥 소리'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보복 소음'이 아니라 그냥 '생활 소음'이다 수없이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이곳에서의 평온한 밤 10시 그 시간에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 시끄럽지도 않은 그렇지만 가만있으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멜로디였다. 내가 예민할 수도 있으니 남편에게도 물었다. 남편도 들린단다. 다행히 방에 들어가면 들리지 않는데 거실 특정 위치에서 끊임없이 멜로디는 무한반복되었다. 이웃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챙겨준 것들 너무 잘 먹었다며 고운 딸기를 가져다준 윗집 아이엄마, 그리고 리모델링으로 전혀 안 힘들었으니 걱정 말라며 4살 아들까지 온 식구가 함께 뽀로로 케이크를 들고 온 앞집. 답례가 너무 늦었다며 수제 카스텔라를 챙겨 온 아랫집 아주머니까지. 

내가, 우리 가족이 혹시 어느 집에 피해를 준 걸까... 그래서 이런 소리를 내는 건가? 한번 당해보라며 아침까지 같은 소리를 틀어놓은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집안 청소를 하는데 혹시나 싶어 어젯밤부터 소리가 나던 거실 그 위치에 가만히 서봤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그 소리에 온마음을 집중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았다. 무언가 보였다. 설마 이건가 이게 혹시 켜져 있나?  그건 바로 입학을 앞둔 막내아들이 예비소집날 무료체험으로 받아온 '밀크티' 기기였다. 

아뿔싸.... 나를 닮아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아들 녀석이 공기청정기 위에 얌전히 올려둔 그 기기에서 타자연습 배경음악이 밤새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었다.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 한분이 내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차차 좋아질 거예요." 

오늘도 쿵하는 생활소음에 놀라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한다. '차차 좋아질 거야.'

거기에 보태 밀크티 기기 보며 씩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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