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동으로 이사하니까 좋아?"
유난히 춥던 며칠 전, 유치원 하원차량을 같이 기다리며 아들 친구 할머니가 물으셨다.
이사하게 된 상황을 다 아시는지라 그 질문을 던지는 눈빛에서 오랜만에 나의 할머니의 따뜻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꽉 차오른 눈물을 삼키며 "적어도 밤에 위층에서 술주정하는 소리는 안 들어서 편해요 어머니." 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럼 됐다면서 사람 마음 편히 사는 게 제일이라고 또 한 번 내 눈물샘을 건드리신다.
칼바람에 몸까지 들썩이던 아주 춥던 날이라 알 수 없이 계속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콧물을 훌쩍이는 걸로 자연스레 참아낼 수 있었다.
아들 친구 (외) 할머니를 보며 늘 아들 친구 엄마가 부러웠다. 유치원 들어가던 5살 때부터 올해 학교 입학을 앞둔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아들 친구 사실 친구들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친구들은 쌍둥이다. 쌍둥이 할머니는 언제나 딸이 안쓰럽다고 하셨다.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챙기는 것만으로도 넘쳐 보이는데 부족한 게 없나 늘 바쁘시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아들 친구 엄마에게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언니는 참 좋겠어요. 전생에 어떤 덕을 쌓으면 이렇게 엄마 사랑을 받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언니의 대답이 이어졌다. "보미씨가 너무 착해서 그래. 보미씨도 엄마 여기로 이사오 시라고 해."
대답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가슴속에서 소란스럽게 요동쳤다.
설날 요양병원에서 면회했던 아빠 얼굴, 동행했던 엄마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내 결혼식 전날에도 술 드시고 뭐가 그리 서운했는지 너는 술 안 먹는 남자랑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던 아빠. 크는 내내 나는 술이 무서웠고 술 먹은 사람이 무서웠고 술 먹고 소리 지르고 화내는 사람이 무서웠다. 아빠는 그렇게 늘 내게 무서웠다. 그런 아빠인데도 나는 참 옆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딸이었다. 심혈관 시술 후 금주는 당연함에도 몰래 술 드시려는 아빠를 말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아빠에게 병이 찾아왔고 그렇게 또 결혼 후 어느덧 8년째 아픈 아빠 옆에서 여전히 노력하는 딸이다.
그런 아빠 덕에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오히려 위로하고 살펴야 하는 존재였다. 아빠로 인해 다친 마음의 상처를 쏟아내는 곳도 치료하는 곳도 딸인 나였다. 그래서 사실 힘들었고 나도 어리광 한번 부리며 살고 싶기도 했다. 아이였을 때 못 부렸던 투정, 아이를 낳고는 한 번쯤 부려보고 싶었는데 역시 나는 그럴 팔자는 아닌가 보다.
쌍둥이 할머니 질문을 듣고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알겠다.
"보미야 요즘 괜찮니?"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도 고팠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