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 지나면서 달라진 수연이의 모습. 장애의 특성으로 생각했던 요소들이 사회적으로 잘 가다듬어진 모습은 성장이라는 단어의 진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강하게 스치자 이번엔 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숙한 존재가 성숙한 존재로 다가갈 때 성장이라는 말을 합니다. 삶에서도, 생각의 깊이에서도, 피아노 연주, 테니스 실력도 보다 성숙해질 때 성장했다고 합니다. 수연이는 사회에 섞일 때 필요한 최소한의 선에 다가갔기에 훌륭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연이가 성장하는 딱 그 정도의 시간 동안, 저 스스로의 성장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도 마다하지 않는 성향임에도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대해 답이 툭 나오지 않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일하고 퇴근하면 가끔 운동을 나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고 책도 읽고 영여학원도 다녔어요. 하지만 성장했느냐 라는 자문에 경직을 느껴졌습니다.
부쩍 성장한 수연이는 그 이후 3년간 학교의 훌륭한 선생님들과 늘 긍정적이셨던 가족 덕분에 더 성장했습니다. 저 역시 수연이의 성장에 티스푼 하나만큼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수연이가 졸업하던 날, 친한 선생님과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운이 좋아서 수연이의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입학, 졸업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수연이를 통해 성장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 라구요. 한편으로 나의 십 년간의 성장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섭섭합과 조급함도 느껴진다. 이런 이야기를 했죠.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성장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변화했을 거예요. 성숙함에 레이어가 하나씩 추가되는 느낌 말이에요.”
감탄이 아! 하고 나왔어요.
맞아요. 저는 십 년간 성장했다,라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동안 새로 만난 친구를 통해 나와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을 이해하게 됐죠. 이런저런 운동을 하다 말다 하면서 생각보다 러닝을 재밌다는 것도 알게 되어 마음이 힘들 때는 조깅을 하는 습관이 생겼고요. 20대에서 30대가 되며 이젠 마흔의 가치와 준비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죠. 제가 더 성장했느냐 하면 여전히 물음표예요. 하지만 긍정적으로 ‘변화’했느냐 하면 그것은 고민이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요. 어린아이는 멋진 학생으로, 성인으로 성장했고 그 옆에서 저는 아마도 조금은 넓게 변화했을 거라 믿고 싶어 졌어요.
한 아이의 성장 덕분에, 부족한 선생님은 내가 좀 더 멋지게 ‘변화’ 하고 있음을 눈치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