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책을 보면서 차례를 기다렸는데요. 내 앞에 한 할머니가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끙끙 거리며 짐을 올려놓았나봅니다. 갑자기 내 뒤에 있던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가 짐을 같이 버스에 올려주었습니다. 책을 보느라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던 나는 약간 머쓱해지더군요. 내가 같이 올려주어야 했었나 싶었지요. 두 할머니가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처음 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서슴없이 본인도 힘드실텐데 같이 짐을 들어주었습니다. 뭔가 따뜻하고 찡했는데요. 아마 뒷자리의 할머니는 알았을 겁니다. 이 짐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 것인지를요. 몸소 경험해봤겠지요. 그래서 모르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줄수 있었을 거에요.
할머니들의 이런 모습은 지하철에서 더 자주 발견됩니다. 지하철 노약자석 앞에 서 있다보면 할머니들이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주 목격됩니다. 몇십년동안 절친인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데요. 더 놀라운 것은 한참을 이야기하다 할머니 한분이 먼저 내린다는 겁니다. 작별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 걸 보면 예전부터 아는 사이는 아닌듯 합니다. 그런데도 아픈 이야기. 자식 소식등을 거침없이 나누지요. 놀랍다못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말을 하고 싶지만 누군가 들어주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누구와 친구가 되어도 안전한 세상이라 믿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저만치 서있는 모습만 보여도 손을 흔들며 자신 옆에 앉으라는 그야말로 k-할머니들의 오지랖은 참 신기한 광경이었지요.
그런데 웬걸요. 그걸 어느샌가 내가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정신없는 출근길 아무 생각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가 문이 열리면 무작정 내리는 경험,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겁니다. 내리려고 폼을 잡고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타는 사사람이 나에게 말을 건넵니다.
"1층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문만 열리면 아무데서나 내리는 버릇이 생겼어요. 허허."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정보를 오픈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살면서 하나 둘 늘어만 갑니다. 아무장소 아무데나 가져다 놓아도 누구와도 대화거리를 찾아 대화를 할 정도입니다. 나이가 들면 입으로 모든 에너지가 몰린다더니 정말 그래서일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졌습니다.
"당신 요즘에 말이 많아졌어. 그 중에서도 잔소리."
남편도 아이들도 이말에 동의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었는데요. 이제는 쓸데없는 말도 많고 말을 할때 핵심만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일이 발생하게 된건지부터 서사가 길지요. 예전같으면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내가 먼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핵심이 뭔데. 주제만 말해."
그런데 이제 주제나 핵심을 먼저 말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려서 길게 늘려서 말하는 버릇이 생겼지요. 말하면서도 내가 왜 이 말을 이 사람에게 하고 있지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중년이 되어 생긴 놀라운 나의 변화 중 하나입니다. 늘상 낯을 가리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색해 했는데요.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we are the world라는 생각이 내게 들어왔나 싶습니다. 세상을 이 정도 살아보니 사람 사는게 참 비슷하더라구요. 솥뚜껑 열어보면 사연없는 집 없다는 말처럼 나만 어려운게 아니라 모두들 힘듦을 갖고 살고 있구요. 그걸 보듬어주고 나누면 또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지더라는 거죠. 아둥바둥 사는 것보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여유를 부려도 그렇게 늦진 않구요. 제잘난척을 그렇게 해봐도 사실 비슷비슷한 인생살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함께 손잡고 천천히 걸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누군가 20대로 돌아갈거냐고 물으면 싫다고 말하는 오직 한가지 이유입니다. 몸은 아프고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데 마음은 젊을 때와 같으니 답답할때도 있지만요. 삶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여유가 생긴 것 만큼은 갱년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 싶어요. 물론 문득 문득 올라오는 화 때문에 부딪히는 사람도 생기지만요.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죠. 혼자보다는 더불어 사는 것이, 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는 천천히 여유롭게 가는 것이 인생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에요.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수 있고 함께 걸을 수 있고 기꺼이 내 시간과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마음. 그것이 갱년기가 홀연히 우리에게 건네준 선물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