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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의 생각의 정원 Oct 17. 2023

눈물나는 날

"선생님 너무 멋지세요."

"책 출간 진심으로 축하해요."

미디어 리터러시를 함께 공부하는 연구회에 갔습니다.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를 공부한지 삼년째. 평소 관심있던 분야였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삼년 쯤 지나자 출판사에 관련 책을 내 줄 수 있는 제안을 받았고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제껏 공부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한번 더 공부하는 계기가 될테니까요. 그 책이 나와서 책을 들고 연구회에 갔습니다. 무엇보다 그 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회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할것 같았어요.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결과니까요.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평소 칭찬에 쑥스럽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지라 손사래를 쳤지만 어색하고도 좋았습니다. 이 연구회의 크나큰 성과라며 공개연수회에서 책을 소개하자며 연구회에서 이 책을 구매해서 봤어야 한다는 말에는 몸둘바를 모르겠더라구요. 칭찬을 많이 받아보지 못해서인지 내가 화제의 중심이 되어 칭찬 받는 것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안에는 부끄러움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단 걸 그날 집으로 가는 길에 깨달았습니다. 함께 책을 펴내는 공저자인 언니와 통화를 하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지하철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요.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앞으로 하고 싶은 일,내고 싶은 책에 대한 대화였습니다. 문득 말을 하다보니 언니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제나 언니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면 말했습니다.

"좋아. 진짜 좋은 생각이다. 해봐. 잘 될 거 같아."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조건없이 잘된다고 해주는 언니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힘이 있었기에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었지요. 앞뒤 안가리고 일에 덤비는 성향이 있는 나지만 잘하고 있다는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내고 나서 책이 잘 나가지 않을때는 자책을 많이 했지요. 어찌 한술에 배부르랴 싶으면서도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그럴까 고민도 되었구요. 출판사에 수없이 많은 제안 메일을 보내 거절 당할때마다 자신감은 커녕 쭈구리로 변해만 갔지요. 그런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 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큰 힘이 되었지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떠오르는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제의 유튜브를 누가봐? 당신 주제는 흥미롭지가 않아. 아무도 관심없어."

"미디어 리터러시? 그걸 누가 알기나 해? 그런 책을 누가 읽어. 영 아닌데."

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 남편이었습니다. 

"당신 잘되면 나도 좋지. 그치만 정확하게 사실을 말해줘야 하잖아. 당신 팔로워나 구독자 안느는 이유, 책이 안팔리는거 다 이유가 있어. 당신이 추구하는건 비쥬류의 관심사야. 그걸로 유명해지기는 힘들어. 다 내가 당신 위해서 하는 소리야."

진심을 담았다고는 하지만 그 말들이 너무 쓰라렸습니다. 지금 잘되고 있지도 않은데 처음부터 그럴줄 알았다는 식의 평가는 나를 더 무너지게 만들었지요. 그런데도 그 말들이 나를 위해서 촌철살인 한거라며 남편은 시시때때로 나를 자극했습니다. 물론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말을 해 주겠어."

라는 이유를 대면서 서로를 깎아 내렸지요. 그 말들이 너무 상처가 되었지만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말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축하를 들으면서 남편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작은 일에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실 마음 속에서는 이런 이유가 있었는데요. 남편은 알지도 못하며 이게 그렇게 화낼일 이냐며 어이없어 했습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기에 결국  어쩌면 사람 마음에 대못을 밖을 수 있느냐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눈물을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내가 그렇게 서러웠었나 싶을 만큼요. 

아마도 그 이유말고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나의 삶의 무게가 모두 포함된 눈물이었나 봅니다. 

50이 넘어가면 몸의 상태가 나빠져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서둘렀던 건데요. 그것이 나에게 무리였는지 힘겨웠나 봅니다. 아니면 어쩌면 갱년기라는 것이 성큼 다가와 별 큰 이유없이 감정이 격해지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가장 가깝고 지지받고 싶은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가 너무 아팠습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었다면 남편과 똑같이 했을지라도요. 당장은 내 아픔이 더 크고 단단하게 느껴진 모양입니다. 

'결혼은 평생 싸울 상대를 만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남편은 상처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우리는 또 그렇게 평화를 찾았습니다. 실제적으로 마음 속에 앙금이 다 풀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풀기로 했지요. 어떤 의도에서 그랬는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데일카네기는 '하느님도 심판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당신과 내가 감히 그래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바꾸고 싶고 통제하고 싶고 개선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신부터 그렇게 만들어보라구요. 그러면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마음이 사그라 들거랍니다. 바뀌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죠.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나는 그를 얼마나 지지했던가 싶어 조금 찔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모른 척 내 감정만 쏟아부어버렸지요. 나를 봐주고 나를 달래주라는 의미에서요. 남편은 조금 억울하기는 했겠지만 나의 투정을 받아주었습니다. 결혼 15년이 넘어가면서 스파링 상대에게 맞추고 공격과 수비를 적절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구력이 생긴 거겠지요. 

가끔 펑펑 울고 싶은 날이 있어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쏟아내던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네요. 내가 내 연민에 젖어 수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으니까요. 점점 나는 더욱더 소중한 존재이며 귀하게 대접받고 싶어 찡찡거리는 마음이 점점 커지겠지요. 세상에서 물러나 뒤곁에 앉은 느낌이 들수록 더요. 오늘 내가 충분히 축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서운함을 다 쏟아냈던 것처럼요. 언제 어디서 눈물꼭지가 열려 내 감정을 퍼부을지 나도 알수 없습니다. 다만 그 빈도와 강도가 조금 조절 가능했으면 싶은데요. 가능한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다 살아내고  홀연히 뒤를 돌아볼때쯤 그때는 알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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