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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의 생각의 정원 Oct 19. 2023

믿음직스럽다고 방치하지 마세요.

"모두들 현장학습 나가는 날은 선생님도 일찍 조퇴해요. 그래도 되잖아.애들도 없는데."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학생이 있어 매일 보건실로 찾아와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보건선생님입니다.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은 당연히 신체적 통증도 함께 느낍니다. 그래서 보건실을 찾았다가 보건선생님에게 의지 아닌 의존을 하게 되는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요즘 학교의 한 여학생이 그렇게 의존을 해서 선생님이 힘이 들다고 합니다. 아프다고 하니 가랄 수도 없는데 와서는 줄곧 말을 시킨답니다. 공감 능력이 낮은 학생은 엉뚱하게 대화의 흐름을 벗어나고 그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으려니 너무 기운이 딸린다는 거죠. 오지 말라고 해도 매일 매일 한두시간씩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학생이 처음엔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모르겠답니다. 그러니 하루쯤은 일찍 조퇴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채워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현장학습 인솔해서 힘드신데 저희만 일찍 조퇴할수도 없잖아요. 수업 시간 끝날때 맞춰서 조퇴해야지요."

책임감이 무척 강한 선생님입니다. 흔히 말하는 mz세대의 핵심인 30대초반인데 전혀 중년 선생님들과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화도 잘 통하고 자신의 일도 똑부러지게 처리하니까요. 

"선생님도 리프레쉬 해야지. 안그러면 지치잖아요."

"아니요. 리프레쉬는 제가 알아서 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한테 일반 교사 수업이나 몰아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는 더 스트레스에요. 코로나 있었을때 수많은 일이 폭증했지만 아무도 제일을 대신하거나 나눠주지 않았잖아요. 제가 총대를 매고 모든 일을 주관했는데 사실 더 많은 일을 못줘서 안달이었죠.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견뎌냈는데 이제 조금 안정이 되니 저보고 수업을 하라잖아요. 나의 업무는 수업이 아니에요. 내가 일반 교사들의 수업을 나눠갖기 위해 보건실에 있는게 아니라구요. 만약 제가 수업 갔다가 사고라도 일어나면 누가 책임질 건데요. 아무리 수업을 갔어도 제 책임이잖아요. 안그래도 어느 지방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보건 교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한거에요.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는데 담임 선생님은 잘 모르니까 타이레놀만 준 거죠. 그 친구가 뇌출혈이 나서 지금 문제가 커졌어요. 그때 자리에 없던 보건 교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거죠. 저는 그런 상황이 걱정이에요. 제 할일은 제가 한다구요.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일은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들어보니 선생님의 노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나야 원래 수업을 위해 교직에 들어선 사람이니 우리 아이들이 소속된 학급의 수업을 맡으라고 떠넘겨도 사실 할말이 없지요. 하지만 보건 선생님은 수업이 주 업무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건 내가 생각하는 보건 선생님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고유 업무인 수업 하잖아. 거기에 담임까지 해. 그게 다가 아니고 각각 업무까지 맡잖아. 그런데 보건 교사는 왜 자신의 업무만 해야해. 담임과 기타 업무를 하는 우리처럼 보건 교사도 수업을 함께 하는게 맞지."

친한 선생님의 입장이었습니다. 학교 일에 대해서 대단히 상식적인 입장을 주장하던 선생님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또 그이야기도 납득이 되었습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타협점 없는 의견 대립이 이어지겠구나 싶었지요. 

그런줄도 모르고 보건 선생님은 내년에는  부디 수업 부담만은 사라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교사 수를 줄이는 이 환경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아 보였지요. 특히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는 자유학기제 수업이나 스포츠 수업시간에 보건선생님을 투입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워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일을 구멍 안내고 잘하고 있어요. 담임 선생님들이 돌보지 않는 마음이 아픈 아이들까지 제가 다 떠맡아서 상담하고 대화하고 있다구요. 담임 샘이 잘 받아줬다면 제게 올 생각도 안했을 거에요.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일을 잘 해내겠다는데 왜  자기들 일을 저에게 미루는 걸까요. 처음부터 업무롤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왜 인정을 못하죠?"

여리고 성실한 보건선생님의 볼멘 소리가 한참 동안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화이트 사파이어는 과습이라고 낑낑대는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춥거나 물이 많아도 잎이 노랗게 병들어버리는 알로카시아와는 다릅니다. 연두색 빛의 청아함을 뽐내면서도 공기가 조금만 건조하면 누렇게 시들어버려서 수시로 분무기를 해줘야하는 고사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지요. 크게 신경써서 돌보지 않아도 튼튼하게 자리를 잠고 새순을 내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하얀 꽃을 피우기도 해요. 꽃이라면 화려하고 눈길을 잡아끄는 다른 식물에 비해서 화이트 사파이어는 그것마저 겸손합니다. 꽃이라고 뽐내거나 잘난체하는 법도 없지요. 그저 제자리에서 제가 할 역할을 다하며 무럭무럭 자랄 뿐입니다. 

요란하게 소리내지 않아서 식집사가 과도하게 돌봐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서인지 믿음이 갑니다. 모든 식물이 홀연히 내 곁을 떠나 식물나라로 갈 수 있다는 걸 안대도 말이죠. 화이트 사파이어가 시들어버리면 그 어느 식물보다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믿고 의지했던 아이니까요. 그래서 더 있을때 잘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제 몫을 다해내는 아이를 들여돠봐줘야 해요. 믿으니까 잘 있겠지 하고 있기에는 그 아이도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니까요. 

조퇴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매일 마음과 몸이 아파하는 아이들을 수시로 치료해주는 보건선생님을 보면서 화이트 사파이어의 우직함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낑낑대지 않아도, 엄살 부리지 않더라도 그 분의 애씀을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세상이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야 더 큰 믿음으로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성실과 믿음으로 자리를 지켜내는 선생님이 아프지 않기를 바래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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