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된 '바깥' 세계에서 '안'쪽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다
나에겐 오래된 꿈이 하나 있다. 잉카 문명의 중심지 마추픽추를 가보는 것이다. 마추픽추 사진 한 장을 보자마자 단숨에 매료되었고, 꿈 이야기를 하게 될 때면 언제나 그곳에 한번 가보는 것을 일 순위로 꺼내곤 했다. 얼마 전 지인이 “여전히 마추픽추는 유효해?” 물어왔다. 나로서는 고민이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야죠!”. 물론 아이가 생겨버린 후로 페루는 고사하고 1시간 거리의 부산도 혼자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아이가 다 크고 나면”이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나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지구 반대편으로의 여행, 못할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쩌면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일이 벌어졌다. 돌연 코로나19가 시작된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어본 우리, 그간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잃었고, 앓았던 3년. 집안에 손소독제를 구비하고 현관 앞에 가족 수대로 마스크 걸이를 달아두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마추픽추는 꿈으로 남겨둬야 할지도 모르겠네.”하고. 20년이나 품고 살았던 꿈이 코로나 2년 만에 희미해졌다. 지인들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은 사실 '꿈'을 꿀 수조차 없을 만큼 무서웠다.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절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아이는 5세였다. 이제야 제법 수월한 나이가 되었는데 황금육아기를 꼼짝없이 집안에서 실내에서 보내야 한다니 암담하기만 했다.(지금 생각해도 많이 억울하고 아쉽기만 하다.) 주말마다 나들이를 다니고 바깥 세상을 탐험하며 지내다가 집 앞 식당도 제대로 갈 수 없는 이상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 했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해보았다. 과자집을 만들고 김밥과 피자를 만들어 먹었다. 종이컵 1000개 쌓기도 하고 보드게임을 주구장창 했다. 가끔은 사람 없는 시골길도 무턱대고 찾아다니며 바람을 쐬기도 했다. 바깥 활동이 제한된 세계를 경험하고 보니 문득 그렇다면 ‘안’ 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물음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일상이라 생각했던 것 중 대부분을 제외하고 또 제외한 후 내 곁에 최종적으로 남겨진 건 가족이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면서 언제나 곁에 있는 건 가족. 전 세계가 ‘사람’이 위험하다고 경보를 보내는 시점에서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백을 두라고 명령하는 와중에 여전히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는 건 가족이 아닌가. 바이러스가 묻었을까 봐 한번 쓰고 버려야 하는 일회용품 왕왕 쓰는 와중에 입속으로 들어가는 식기를 여전히 함께 사용하는 건 가족이었다.
피부에 맞닿아있을 만큼 지척에 있는 가족이기에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걸까. 나는 세상이 멈추고 난 뒤 천천히 깨달았다. 바깥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사람을 만나는 건 피해 달라는 메시지를 받으며 그제야 내 곁에 있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된 것이다. 과연, 가족이 없었더라면 코로나19라는 팬더믹 상황 속에서 나는 얼마나 견딜 수 있었을까. 아마 바이러스와 함께 나라는 존재가 새까맣게 잠식되어버리지 않았을까. 남편 덕분에 팬더믹 상황이 덜 무서웠고 아이 덕분에 한 번 더 웃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는 혼자 있어도 제법 강한 사람이지만 가족과 함께라면 몇 배로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웠다.
가족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면서 그간 무성하게나마 고민했던 둘째 낳기 프로젝트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만드는 일이 힘들고 고되고 나의 영혼을 갈아 넣는 일이 될 게 뻔하지만 가족의 탄생이라는 시각으로 보자면 그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지 않은가의 마음이 생겨버린 거다. 비행기를 타고 훌쩍 여행을 다니는 일보다, 맛집을 다니며 산해진미 즐기는 일도 모두 덧없게만 느껴졌다. 팬더믹 상황에서도 부둥켜안고 지낼 수 있는 존재,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나는 위험 종자가 될 수 있으며, 갑작스럽게 격리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겠지. 마스크를 찾아 귀에 걸어주고, 밥을 지어 방문 앞에 놓아주고, 병원에 연락해 나를 데려다주겠지. 지구상에 또 다른 이름의 코로나19가 생기더라도 어쩌면 가족과 함께라면 조금 더 안도하고, 힘을 내볼 수 있을 것이다.
거리 두기가 사라졌다. 현관문 앞에 더 이상 마스크를 걸어두지 않는다. 이제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자주 본다. 그렇게 코로나19가 지나간 자리, 우리 집에는 둘째가 태어났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TV속에는 해외 로컬에서 찍은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둘씩 방영되고 있다. 마추픽추를 가는 것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일로 되돌아왔고 그래서 나는 다시 꿈을 이어가기로 했다. 다시 한번 더 육아를 하느라 시간이 제법 더 걸리겠지만 어쩌면 혼자가 아니라 두 아이와 함께 가게 될지도 모른다. 두 아이와의 남미여행이라니, 나는 꿈을 꿀 때마다 괜스레 힘이 나고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