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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Oct 16. 2023

나는 자꾸만 엄마가 되어간다

또 다른 방식으로 생의 주연이 되는 방법을 알게 될 것만 같다


 



나는 커서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다. 어떤 커리어를 가진 우먼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잘 나가는 멋진 여성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상상 속의 나는 또각거리는 구두를 신고 멋진 정장을 입었다. 막연하게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하는 것을 꿈꿨기에 어른이 된 상상 속 배경 화면은 주로 공항이 되었다. 외국어는 최소 세 개쯤 할 줄 알고 멋진 캐리어를 이끌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멋진 여성. 아마 다들 한 번쯤은 꿈꿔본 장면이지 않을까?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면 안 될 것 같고, 더욱이 임신이나 출산은 애초에 없는 옵션이었다.          



 2021년의 나는 누가 봐도 엄마의 삶 그 자체였다. 펑퍼짐한 임부 원피스를 입었고, 어깨에는 항상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둘러매고 뒤뚱뒤뚱 걸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보았다면 완벽히 실망했을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빨리 결혼한다는 속설을 참 많이 들었는데, 나 또한 그에 속했다. 학창 시절 공공연하게 “결혼은 안 하고 세계를 누비면서 멋지게 살아야지,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 짐짓 진지한 투로 말하고 다녔다. 매번 그런 말을 해서 그런지, 나는 정말로 내가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더군다나 엄마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정말 나만을 위해,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갈 줄 알았다.  


         

 “왜 여자들은 생의 주인공으로 살려 들지 않는 걸까요?”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잘 나가는 디자이너였다.  “많은 여성들이 헌신적인 조연으로 살아. 하지만 그건 그들에게 생의 주연이 되는 또 다른 방식이란다.”           ___ 오소희 <<어린 왕자와 길을 걷다>>          

 

           

  만삭의 몸으로 큰아이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걸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등원 시간이라 아파트 단지에는 말괄량이 꼬마 아이들과 분주한 엄마들로 가득 찼다. 나와 아이가 걸어가던 길 맞은편에서 배가 귀엽게 나온 임산부 엄마와 세 살 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왔다. 행복해 보였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충만한 느낌이었다. 그들을 앞을 지나가며 생각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 나 정말 엄마구나.’  엄마가 된 지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그제야 정말 엄마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모든 것들이 스며들듯 받아들여졌다. 



 옵션에는 없었던 임신과 육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고 있는 그 지점을 나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임신으로 인해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었어도, 더없이 뒤뚱뒤뚱 걸어 다니게 되어도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시절임을 직감했다. 엄마이면서 앞으로 또 엄마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사과는 황금 사과다. 얼른 한 개 집어 먹어.” 

 나의 엄마는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옛날부터 아침마다 사과 한 알을 깎았다. 그리고 꼭 내 입에도 하나 넣어주었는데,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그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 더 먹으라고 하면 “싫어”를 외쳤다. 그러면 엄마는 “내 나이 돼봐라, 니도 아침마다 사과 깎아먹고 있을 거다.” 하며 미래를 내다보듯 말했다. 엄마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세월이 흘러 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과 한 알 씻어 먹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엄마가 그랬듯이 사과를 작고 예쁘게 깎아서 딸에게 내민다. 군말 없이 꿀떡 받아먹어주면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이고, 먹기 싫다며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손바닥으로 사과를 밀어내면 그게 그렇게 속상하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하나만 먹자, 응?” 사과 한 조각 더 먹이려고 헌신적인 엄마가 되고 만다.      



 “어휴, 발 시리다. 얼른 양말 하나 신어.” 

 엄마는 서늘한 계절이 되면 집안에서 양말 신으라고 성화였다. 발이 시리면 몸 전체가 시릴 수 있으니 언제나 발을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성화에도 양말을 신지 않는 못난 딸이었다. 어리고 젊었으며 한 번도 발이 시렸던 적이 없으니까. 양말 안 신어도 몸이 따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양말 신지 않고서는 함부로 집 안을 누비질 못한다. 그리곤 맨발로 집 안을 활보하는 딸아이에게 “양말 가져와서 좀 신어줘”라고 보채는 엄마가 되었다. 맨발의 아이를 보면 마음이 너무나 갸륵해지니까.            



 나는 엄마가 되어간다. 지금도 엄마인데 자꾸만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공항 대신 매일 놀이터를 가는 삶, 캐리어 대신 킥보드가 더 든든한 삶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밉지 않다. 중요하지도 않다. 근사한 삶은 장소와 모습에 상관없이 주어진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생의 주연이 되는 방법을 알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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