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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Oct 12. 2023

여자,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끝장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아이를 낳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걸 누렸던 거 같아.”     


 나보다 먼저 두 아이를 키워낸 친구는 격동의 20대를 지나왔다. 미국에서 1년간 공부를 했고 그랜드 캐년을 여행한 멋진 외국파가 되었다. 그다음 1년은 뉴욕에서 인턴으로 일을 했다. 이후의 행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이력이었다. 몇 년 뒤 친구는 결혼을 했고 다음 해 아이를 낳았다. 사람 하나 키우는 일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인 줄 몰랐기에 친구는 자주 힘들어했다. 왜 이렇게까지 아이 키우는 일이 버거운가에 대해 나누던 대화는 결국 ‘자유’라는 두 글자 앞에 멈춰 섰다. 출산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자유를 우리는 여전히 기억한다. 친구는 미국에서, 나는 호주에 있을 때 우리는 어렵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우리 정말 멀리까지 왔다 그지? 를 연발하던 스물넷의 우리.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돈을 벌었다. 온갖 새로운 경험을 통해 위로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가능하면 더 멀리 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뻗었다.




          

 친구는 임신과 동시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은 아이 하나를 앞에 두고 종종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아이들이 크면서 친구도 조금씩 수월해졌다. 나도 곧 친구 따라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그녀의 상황을 곧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우리는 종종 미국과 호주에서 국제 전화를 하던 십 수년 전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들을 기관이나 남편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처지인 우리는 그래서 반짝이던 과거가 꿈같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그런 시절들을 곱씹을 때만큼은 여전히 해맑게 웃을 수 있다.           





 87년생인 우리는 윗 세대가 누리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으로 경험한 세대이다. 어학연후, 유학, 워킹 홀리데이의 기회를 잡기만 하면 되었다. 전국 어디를 여행하는 일,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향하는 것도 우리에겐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자유’로 ‘경험’을 샀던 우리 세대는 ‘나’를 보살피며 키워나갔던 이십 대를 보냈다. 해보고 나서 좋았던 것은 다시 한번 더 계획할 수도 있었다. 한번 경험한 것은 내 몸이 쉽게 잊지 않았으니 자꾸만 나를 업그레이드시킨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남편이 생겼다고,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리셋’ 시킬 수가 없는 거다. 나는 도저히 나를 멈출 수가 없으니까.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키울 때 종종 동굴 속으로 숨는다. 더 이상 어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때, 주위의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때 입을 닫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밖으로 뿜어내던 에너지를 집안에 가둬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넋을 놓고 만다. 원했던 일들을 끝끝내 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여기서 나를 멈추게 될까 봐 두렵다.     


 아이를 낳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더 필요한 건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여자들은 돈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이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출산을 머뭇거린다.(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삼십 년간 내가 이룩한 것들을 멈추거나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여유가 없다. 여자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돈’이 아니라 내가 유지해 온 커리어, 나의 세계, 나의 미래가 최소한의 모양으로나마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끝장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         


   




 올해는 친구가 결혼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엄마 10년 차라는 여유가 흐른다. 우스갯소리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인생의 숙제라고 여겨지는 육아를 한숨 돌렸다.  아직 삼십 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기에 아름다운 나이임에 틀림없다. 격동의 20대를 보낸 힘을 기억해 내고 잃었던 커리어를 다시금 연결해야 한다는 커다란 숙제가 남아있다. 누군가는 경단녀라는 이름표로 바라볼지 모르고 혹은 그 이상으로 현실이 녹록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를 길러낸 힘으로 더 단단해진 친구의 모습을 보면 못해낼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된 여성들의 삶이 너무 경이롭다. 아이를 낳기로 한 결심 앞에 잠깐 멈춰둔 세상, 그리고 다시 연결되는 힘. 한 그루의 강한 나무처럼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도 여자들의 삶을 상상하며 이렇게 글을 쓴다.  


 삶은 계속 흐르고 있고 어떻게든 다른 세상과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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