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화 작가 Mar 17. 2024

로마군과 몽골군이 싸운다면 나는 누구 편인가?


 어린 시절의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편이었다. 주로 했던 일 중 하나는 전쟁놀이다. 문방구 뽑기에서 가져온 조그만 장난감, 인형, 레고 사람 피규어 등을 모두 꺼내 양 측으로 나누고, 혼자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것이다. 작은 방 안에서 펼쳐지는 장난감 캐릭터 몇십 명의 정적인 움직임이다.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는 거대한 전장에서 펼쳐지는 백만 대군의 치열한 전투였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해외 유튜버의 게임 영상이 있다. 이걸 보며 내 어린 시절은 이미 머나먼 과거라는 걸 느꼈다. 나는 장난감 몇 개를 바닥에 깔아 두고 백만 대군의 치열한 전투를 상상으로 그렸는데,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이용해 진짜 백만 대군의 전투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지형을 선택하고 양측에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병사들을 원하는 숫자대로 배치한 뒤 명령을 내리니, 백만이 넘는 병사들이 각자의 특성을 살려 전투를 하는 것이다. 그걸 관전하면서 또 원할 때는 직접 개입하고 조종할 수도 있다.



 분명 기술은 크게 달라졌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건 있나 보다. 해당 유튜버가 시뮬레이션한 게임 영상을 보니 지극히 흔한 선과 악의 구도였다. 방어를 하는 쪽은 일종의 인류 연합이었다. 고대 로마군부터 세계대전 당시의 군인들, 현대 군인을 거쳐 미래의 첨단 기술이 접목된 군인들까지. 장비와 기술은 모두 달랐고, 탱크나 전투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모두 그 기반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십 분의 시뮬레이션 영상 끝에 결국 승리하는 건 이 쪽이었다.



 반면 침공하는 쪽은 종 자체가 다양했다. SF 소셜이나 영화에서 흔히 악의 무리로 표현되는 그런 캐릭터들이 있었고, 지극히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짐승들, 생명력을 잃은 듯한 좀비들도 있었다. 인간도 있었는데 복장이나 무기, 묘사된 형상을 봤을 때 흔히 '몽골군'이라 이야기할 법한 유목 민족의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방어하는 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숫자 자체도 훨씬 많았다. 물론 결국엔 패배하지만.



 그냥 서구권의 어느 유튜버가 즐긴 전쟁 게임 시뮬레이션 영상 한 편이었다. 어릴 적 나와 같은 아이들이 흥미롭게 별생각 없이 보고 즐길 그런 게임 영상이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로마군은 선의 구도에, 몽골군은 그것도 다른 종들과 엮여 악의 구도에 자리 잡고 있지? 만약 나를 로마군 vs 몽골군 구도 중 한 곳에 배치한다면 나는 어느 쪽에 배치될까?



 생각해 보면 역사, 문화, 언어, 지정학적 위치, 유전자까지... 이 모든 걸 따졌을 때 우리나라와 더 유사한 면을 보이는 건 로마군이 아닌 몽골군이다. 한국인이라는 내 특성만 가지고 저 구도에 배치된다면 난 당연히 후자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과연 당연하다는 듯이 악의 무리에 배치된 유목민족이 당연하다는 듯이 패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 속 병사들은 게임 속 병사들이다. 해당 유튜버의 다른 영상에선 또 다른 구도로 배치될 것이고 승패도 달라질 것이다. 이건 결코 해당 유튜버나 그 영상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리고 고작 영상 몇 개만 본 혼자만의 추측이지만, 서구권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 유튜버 입장에선 역사적으로 훈족, 몽골군 등의 유목민족이 달갑지 않게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선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질 게 뻔하다. 누군가는 로마군을 상대 구도에 배치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마음 아픈 일이 아니더라도, 일상에는 수많은 대립구도가 있다. 어쩌면 그저 각자의 입장이나 의견이 다를 뿐인데 때로는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인 듯한 구도가 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전쟁이 아닐 일이 전쟁처럼 번지기도 하고.



 여기에는 '나'라는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가 큰 몫을 한다. 어느 한쪽에 자기 정체성이 강하게 묶여 있을 경우 상대와의 다름이 때론 다툼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 다름이 내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다름이 강조될수록 내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고통받고 이분법적인 구도에 제한받는 것은 본인이지만.



 거의 없긴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스포츠 경기를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가 이기고 지는 건 상관이 없다. 그저 각 선수들이 스포츠 정신을 갖고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 멋진 경기를 보여주길 기대할 뿐이다. 왜? 나는 둘 중 어느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경기는 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