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상가 건물이 있다. 1층에는 음식점, 카페 등이 있고 그 위에는 꽤 다양한 학원들이 있다. 엘리베이터는 건물 중앙에 있고, 이를 타려면 입구로 들어가 90도를 꺾어야 한다.
별다른 생각 없는 그런 날이었다. 평소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방향을 꺾었다.
그런 날 있지 않나.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려던 버스가 오고,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자마자 신호가 바뀌는 그런 날. 오늘이 그랬다. 기다릴 틈이 없었다. 건물 입구로 들어가 방향을 꺾자마자 이미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사람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걸어가던 가속력을 그대로 이용해 멈춤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거 없지만 운수 좋은 날이다.
하지만 사소한 몇 초 차이에 혼자 누리던 만족감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흩어졌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냄새라도 났나? 아니다. 위험물이라도 있었나? 그런 건 없었다. 흔들리기라도 했나?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많았나? 아니다 딱 한 명만 있었다. 그럼 그 사람이 위협적이기라도 했나? 아니다. 그냥 어린 여학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그 학생의 반응 때문이었다.
나는 보았다. 그 어린 학생은 나보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탔다. 성격 급한 한국인들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아무런 층도 눌러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내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입구 쪽 구석, 즉 버튼이 몰려 있는 곳에 마치 움츠러든 듯한 느낌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히 버튼이 한 곳에서만 있는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학생과 반대 방향 벽면에도 버튼이 있는 그런 엘리베이터였다. 나는 몸을 돌려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바로 내가 갈 층의 버튼을 눌렀다. 학생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시야각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한 위치에 자리 잡고 하염없이 층수 계기판만 바라봤다. 90년대 '저 이번에 내려요'도 아니고, '전 5층 갑니다'라고 먼저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선의로든 무엇에서든 내가 뭘 하는 것 자체가 이 학생에겐 놀람을 일으킬 것 같은 그런 긴장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20층 같은 5층에 도착하고, 급한 일도 없는 나는 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나의 길을 갔다. 당연히 엘리베이터 문은 빠르게 닫혔다. 확실한 건, 내가 내릴 때까지 그 학생은 아무 층을 누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같은 층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사실 객관적인 사실이라야 별 거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것뿐이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나 혼자 필요 이상으로 재빨리 층 버튼을 눌렀고, 어떻게 하면 무해한 기운을 뿌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괜히 앞만 보며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실 그 학생은 그냥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수로 버튼을 안 누르고 구석에서 폰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학생의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해 보면, 웬 아저씨가 빠르게 자신을 뒤따라 엘리베이터를 탄 꼴이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돌이켜 보면, 한 번씩 난감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냥 나의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가다 보니 골목 혹은 거리에 전혀 모르는 여성과 나만 있을 때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의식하고 있음이 느껴지고.
하필 그게 저녁이면 더하다. 내향적인 성격에 조용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두기 귀찮아하는 내가 이럴 땐 괜히 요란을 떨기도 했다. 책이라도 들고 있을 땐 내가 무려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임을 알리고 싶기라도 하듯 표지 방향을 상대 쪽으로 돌린 적도 있고, 괜히 폰을 꺼내 액정 빛을 냄으로써 내 위치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혀 급한 일이 없음에도 괜히 빨리 걸어 상대를 일찌감치 추월하기도 했다. 이땐 서로 걷는 방향이 같은지,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길의 폭은 어떠한지 등을 복합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너무 소리를 안 내도 안되고, 적절한 소리로 뒤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음을 인지시켜야 한다. 안 그럼 괜히 빨리 걷다가 오해를 줄 수 있다.
귀찮다. 사실 내 입장에선 굳이 그럴 의무가 없다. 그런데 이날처럼 상대의 긴장 기운이 잔뜩 느껴질 때면 나 역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저 편안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냥 나도 그렇고 남들도 그렇고 서로 편하고 안전하게 살았으면 한다.
며칠이 지탔다. 같은 건물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 있는데, 뒤늦게 어느 여성이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걸 몰랐나 보다. 흠칫 놀라며 머뭇거리길래 나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저는 5층 갑니다."
그 여성이 오해는 안 했으면 한다. 이건 분명 '저 이번에 내려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