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획자가 짠 '지옥의 타임테이블', 그리고 야소

회사는 '말년 병장', 크루는 '신입 설계자'의 이중생활

by 이재민 러닝코치

퇴사까지 딱 한 달. 실제 출근일은 고작 2주 남짓 남은 남자의 회사 생활은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을 주지 않는 회사에 분노하며 짜증 섞인 나날을 보냈건만, 막상 퇴사가 결정되고 공표되니 세상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지어 옥상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내려와도 나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image.png 이러고 있어도 아무도 찾지 않는다. 아 따뜻한 봄날이여~


'아, 이게 인생이지. 오늘 점심은 뭐 먹지? 퇴근하고는 어디를 뛸까? 그러고 나선 또 무얼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이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지내던 나의 '기획력'은 이제 게임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이번 주말에 있을 광주-구례 런트립, 그리고 우리 '병아리 러닝 크루'의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게임 대신 '러닝'을 기획하다: 병아리들의 첫 야소 800


회사 업무에서 손을 떼게 되면서, 병아리 크루 내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주먹구구

식으로 운영되던 수요일 정기 런을 시스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주는 크루장의 리드하에 트랙을 벗어나 서울 도심 곳곳을 달리는 '시티런'을 하고, 다른 한 주는 내가 주관하여 교대 트랙에서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게임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퇴사 직전, 러닝 프로그램 설계에 쏟아붓기 시작한 셈이다.

내가 병아리들을 위해 처음으로 가져온 카드는 **'야소 800(Yasso 800)'**이었다. 바트 야소라는 러너가 고안한 이 훈련은 자신의 풀코스 목표 기록(예: 4시간)을 분/초(4분)로 환산하여 800m를 달리는 방식이다. 별도의 전문 코치가 없어도 스스로 페이스를 잡기 쉽고, 초보자들도 훈련 강도를 조절하기 좋아 인터벌 훈련의 입문으로 제격이었다.


훈련 당일, 미리 단톡방에 공유한 페이스 표를 숙지한 병아리들이 교대 트랙으로 모여들었다. 다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조깅을 마친 뒤, 각자의 목표치를 향해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본격적인 '달리기 훈련'. 평소 조깅 때보다 훨씬 뜨겁고 진한 땀방울을 흘리며 트랙을 질주하는 병아리들의 얼굴에는 묘한 성취감이 감돌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기분 좋게 훈련을 마무리하는 모습에 설계자로서 뿌듯함이 밀려왔다.


image.png 훈련을 위해 모여든 병아리들 ...
image.png 다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운동을 합니다!


노란 병아리 배번 스티커, 그리고 지옥의 타임테이블


훈련이 끝나갈 무렵, 디자인을 담당하는 운영진 동생이 깜짝 선물을 들고 왔다. 바로 **'병아리 러너 배번 스티커'**였다! 마라톤 대회에 나갈 때 크루 티셔츠를 입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병아리 러너 소속이다!"라고 당당히 알릴 수 있도록 배번호에 붙이는 작은 스티커였다. 앙증맞은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스티커를 손에 쥐니, 당장 이번 주말 광주와 구례의 배번호에 붙여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image.png 병아리 병아리한 병아리 스티커


수요일 정기 런이 끝나고, 2월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드디어 대망의 런트립 날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근육맨 동생(근육 병아리)과 함께 짠 우리의 타임테이블은 실로 치밀하고도 방대했다.


목요일 밤: 근육 병아리의 반차 찬스를 이용해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조우, 곧바로 광주로 이동.

금요일(3.1절) 새벽: 광주 찜질방에서 쪽잠 후 경기장 이동, 10K 대회 완주! 점심 식사 후 버스로 구례 이동.

금요일 저녁: 구례에서 부산에서 올라오는 형님과 합류 및 숙박.

토요일 오전: 구례 섬진강 꽃길 하프 마라톤 완주!

토요일 저녁: 기분 좋게 식사 후 서울로 복귀. 일요일은 완벽한 휴식.


우리는 이 완벽한 일정을 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훈련과 여행을 동시에 잡는 갓생(God-生)의 표본이 아닌가!'


하지만 마라톤이 늘 그렇듯, 그리고 인생이 늘 그렇듯. 모든 것이 우리의 치밀한 설계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image.png 준비는 열심히 했지만..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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