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1절 마라톤과 꼬여가는 하동의 밤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의 여운을 뒤로하고, 드디어 내가 직접 기획한 야심 찬 '백투백 런트립(훈련 겸 여행)'의 막이 올랐다.
타깃은 2019년 3월 1일에 열리는 광주 마라톤, 그리고 다음 날 연달아 열리는 하동 섬진강 꽃길 마라톤이었다. 첫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는 유일한 동행자인 '근육 병아리(근육맨 동생)'와 대회 하루 전인 목요일 저녁 센트럴 시티(고속터미널)에서 조우했다. 터미널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든든하게 요기를 하고, 곧바로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잠시 정차한 휴게소에서 달콤한 공주 알밤빵까지 사 먹으며 여행의 기분을 한껏 냈다.
하지만 광주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주변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첫날 밤을 끝낼 순 없지. 더 늦기 전에 광주를 즐겨보자!" 우리는 터미널 근처 순대 국밥집으로 뛰어 들어가, 뜨끈한 국밥에 광주 지역 소주인 '보해 잎새주'를 곁들이며 내일의 완주를 기약했다.
수면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아 모텔을 잡기도 애매했다. 우리는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하필 터미널에 있는 찜질방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근처 다른 찜질방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이 정도는 여행의 낭만이라 치부했다. "좋아, 아직까진 계획대로야!"
찜질방에서 개운하게 씻고 잠시 눈을 붙인 뒤, 대회 복장으로 갈아입고 롱패딩을 걸쳤다. 대회가 열리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가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광주 지하철을 탔다. 재미있게도 광주 지하철의 풍경은 서울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이른 아침, 비장한 표정의 마라토너들로 지하철 칸칸이 채워지는 익숙한 풍경 덕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대회장에 도착하니 추위를 피하려 세탁소 비닐과 우비로 몸을 꽁꽁 싸매고 몸을 푸는 러너들이 보였다. 동네 잔치처럼 정겨운 대회장이었다. 우리는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찬 바람을 피할 겸 다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역 안에서 훈훈하게 워밍업을 마치고, 출발 총성이 울리기 직전 다시 위로 올라가 출발선 **'가장 맨 앞자리'**를 선점했다.
오늘의 작전은 아주 명확했다. "시작하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가서, 대회 공식 사진에 '가장 빠른 병아리'로 박제되자!" 딱 1km만 전력 질주하겠다는 이 치밀한(그리고 다소 관종 같은) 계획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훗날 확인해 보니, 진짜로 공식 사진 맨 앞줄에 가장 빠른 병아리가 되어 당당하게 찍혀 있었다.
1km 전력 질주 후, 근육 병아리와 나는 서로의 페이스에 맞춰 각자만의 레이스를 펼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광주 시내를 만끽하겠다던 런트립의 낭만이 뭔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나의 야심 찬 준비물 중 하나는 60만 원을 호가하는 액션캠 '오즈모 포켓'이었다. 광주의 멋진 풍경을 영상에 담아보려 했건만, 이날 광주의 아침은 가시거리가 5m도 채 되지 않는 최악의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앞에 사거리가 있는지, 갈림길이 나오는지조차 보이지 않는 잿빛 도로는 마치 공포영화 **<사일런트 힐>**의 한 장면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코스 중간에 자갈밭이 튀어나와 발목을 괴롭혔고, 한 손에 액션캠을 계속 들고 뛰다 보니 옆구리엔 지독한 담(경련)까지 찾아왔다. 액션캠을 당장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할부도 안 끝난 60만 원짜리 기계라 이를 꽉 깨물고 참아야 했다.
다행히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부터 기온이 오르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고, 옆구리의 통증도 한결 가라앉았다. 그때, 주로 옆에서 응원하시던 광주 시민분들이 뛰는 우리에게 작은 '소형 태극기'를 나눠주셨다. '뛰느라 숨차 죽겠는데 이걸 왜 주시지?' 생각하다가, 퍼뜩 오늘이 **'3.1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한 손엔 액션캠을, 다른 한 손엔 태극기를 힘차게 쥐고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질주하던 중, 빨간 옷을 입은 한 여성 러너와 자연스레 엎치락뒤치락 동반주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짠 것도 아닌데 말없이 서로의 발자국 소리에 리듬을 맞추며, 묵묵히 의지한 채 끝까지 달렸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와 "덕분에 끝까지 잘 뛰었다"며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그분은 당일 여성부 하프 전체 2위를 차지한 엄청난 고수였다.) 우리는 곧 열릴 동아 마라톤에서 다시 뵙기를 기약하며 인스타 계정을 교환했고, 그렇게 광주에서의 첫 번째 대회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감동도 잠시,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던 근육 병아리가 초를 쳤다. "형님! 추워 죽겠습니다. 빨리 밥 먹으러 가죠!" "어... 나 회복도 해야 하고... 저기 마사지 부스에서 마사지도 좀..." "아, 너무 춥다니까요! 밥부터 먹읍시다!" 결국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근육 병아리의 등쌀에 밀려 다음 행선지로 빠르게 이동했다.
우리의 목표는 대회장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광주의 명물, **'영미오리탕'**이었다. 광주를 대표하는 오리탕 맛집답게, 식탁 위에서 전골처럼 끓여 먹는 오리탕의 비주얼은 압도적이었다. 특히 미나리와 함께 들깻가루가 잔뜩 들어간 구수하고 진득한 육수는 지친 러너의 몸을 단숨에 녹여주었다. 육수 리필은 딱 한 번만 무료고 그 이상은 추가금을 내야 하는 콧대 높은 규칙이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비주얼과 상호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긴 했던 모양이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우리는 다음 날 두 번째 하프 대회가 열리는 '경남 하동'으로 넘어가야 했다. 오리탕집 사장님께 길을 물어, 어제 내렸던 광주 버스터미널로 돌아가 하동행 버스에 올랐다. 어제와 달리 해가 쨍쨍하게 떠 있을 때 이동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일찍 도착해서 하동 특산물로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지!'
하지만 1시간 30분을 달려 하동에 진입하려던 찰나, 우리의 완벽한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 하동은 본격적인 꽃놀이 시즌을 맞아 전국에서 몰려든 상춘객들로 그야말로 '주차장' 상태였다. 하동 입구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무려 30분 넘게 도로에 갇혀 있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숙박'**이었다. 꽃놀이 관광객들이 하동 바닥의 모든 숙소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예약 없이 온 두 남자가 누울 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근육 병아리와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동 구석구석을 하이에나처럼 헤매기 시작했다. 포기하기 직전, 후미진 곳에 있는 어느 낡은 무인텔에 겨우겨우 남은 방 하나를 구했다. 그제야 짐을 던져놓고 바닥에 누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아...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우리는 여행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하동 맛집으로 지친 몸을 이끌었다. 보통 '하동' 하면 재첩국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찾은 곳은 재첩이 나오지 않는다는 전설의 **'일신식당'**이었다. 그곳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당시 1인당 15,000원이라는 가격에 끝도 없이 나오는 황홀한 코스 요리를 마주하니, 도저히 술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하프 마라톤은 까맣게 잊고 다시 소주잔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동의 밤이 무르익어갈 무렵.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산에 사시는 크루 형님이었다. "어, 나 지금 하동으로 넘어가고 있어!"
그리고, 우리의 치밀했던 런트립 타임테이블에는 전혀 없었던, 계획 밖의 일들이 무서운 속도로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