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연애는 '경고', 마라톤은 '청신호'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 지하차도 지옥에서 쏜 한 줄기 빛

by 이재민 러닝코치

고구려 마라톤(32km)이라는 큰 산을 하나 넘고 나니, 장거리 러닝의 세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고수들은 입을 모아 "풀코스를 뛰려면 파워젤이 필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마라톤 용품의 사악한 가격 앞에 늘 망설이는 가난한 런린이였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아울렛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내가 찾아낸 돌파구는 뜻밖에도 '마이프로틴'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근육을 키우려 보충제를 사러 들어가는 곳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러닝복을 샀다. 한 벌에 2만 원 남짓. 나이키의 절반 가격으로 옷을 맞출 수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배송은 하염없이 느리고 최소 8만 원 이상을 채워야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나는 그 기회에 러닝 쇼츠, 긴팔 티셔츠, 파워젤, 단백질 바까지 장바구니에 듬뿍 담아 '마이프로틴 묶음 쇼핑'을 해치웠다.


사회생활과 작별을 고하는 어수선한 시기에 맞춰 도착한 택배 상자들. 마치 세상이 나에게 "너는 이제 딴생각 말고 달리기나 해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틀간 40km, 나만의 혹독한 '런트립'을 기획하다


풀코스를 앞두고 훈련법을 고민하던 중, 병아리 채팅방의 최고수가 툭 던진 한마디가 내 귀에 꽂혔다. "42km를 한 번에 뛰기 힘들면, 이틀로 나눠서 하루에 20km씩 40km를 뛰어보세요. 그것도 아주 좋은 훈련입니다."

오호라, 이거라면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나는 곧장 동아 마라톤 전의 빈 일정을 뒤지기 시작했고, 3월 1일 광주 마라톤과 3월 2일 섬진강 꽃길 마라톤(구례)을 찾아냈다. 인천에 사는 내가 금요일 저녁 광주로 내려가 마라톤을 뛰고, 다시 구례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 하프 대회를 또 뛰고 올라오는 무시무시한 계획.


당연히 이 미친(?) 일정에 동참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나의 영원한 러닝 파트너인 그 '근육맨 동생'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게 '근육 병아리'와 단둘이 떠나게 될 인생 첫 기획 런트립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우선 그 주말에 있었던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 이야기부터 해보려 한다.



수원을 가로지르지만 수원을 볼 수 없는 대회


수원에서 열리는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은 동아 마라톤 직전에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 공인 대회다. 그 명성답게 '병아리 크루'와 'one 크루' 멤버들도 대거 출동했다. 대회장에서 반가운 얼굴도 만났다. 지난 철원 런트립 때 군용 핫팩을 한 박스나 챙겨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직업군인 형님이었다. (이날의 인연이 닿아 우리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image.png 대회 출발전 병아리들...

대회 시작 전, 쥐를 막아준다는 '크램픽스(CrampFix)' 부스에서 시음을 했다가 강렬한 맛에 토할 뻔한 고비를 넘기고 출발선에 섰다. 이번 코스는 수원 시내를 한바퀴 도는 신설 코스라 기대가 컸다. "자, 신나게 달려보자!" 출발 폭죽과 함께 기분 좋은 다운힐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고가 도로가 나오더니 곧이어 지하차도가 나타났다. 고가를 넘으면 지하차도, 지하차도를 빠져나오면 다시 고가 도로… 무한 루프처럼 반복되는 요철 구간이 다리를 가차 없이 괴롭혔다. 고가를 올라가면 높은 방음벽 때문에 주변 풍경이 가려졌고, 지하차도로 내려가면 사방이 벽뿐이었다. 수원을 가로지르는 대회라더니, 수원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코스였다.

image.png 지금과는 다른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 코스


"춘마 풀코스 연습이라 생각해!" 또 한 번의 풀러팅


세 번째 지하차도를 지날 때쯤이었나. 옆에서 함께 달리던 한 선배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오, 젊은 친구 잘 뛰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힘들어 죽겠어요…." 내 엄살 섞인 대답에 선배님이 껄껄 웃으며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지셨다. "춘천 마라톤 풀코스 연습한다고 생각해!"


'응? 춘천 마라톤?' 그 유명한 '풀러팅(풀코스 플러팅)'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경기 마라톤 하프 코스도 이렇게 힘든데, 가을의 전설이라는 춘천 풀코스라니. 하지만 묘하게 도전 욕구가 샘솟았다. 그래, 경기 마라톤도 이 악물고 뛰는데 춘천쯤이야 못 갈 게 뭐람!


지옥 같은 고가와 지하차도를 지나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계를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누적고도 178m라는 난코스에서 1시간 38분! 내 인생 하프 최고 기록(PB)이었다. 마라톤을 접겠다며 하프를 뛰고 한 달 내내 몸살을 앓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훈련하고 응원받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예전의 나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image.png 형님 우리 오늘 잘 뛰었죠??


직장 생활은 삐걱거리고, 연애는 씁쓸하게 마침표를 찍었지만, 마라톤만큼은 나에게 정직한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내가 흘린 땀방울이 기록이라는 숫자로 보답받는 순간, 어찌 마라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토록 나를 설레게 하던 마라톤에게 곧 뼈아픈 배신을 당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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