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속상하지 않아.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게 작년 4월. 어느새 1년을 훌쩍 넘겼다. 작년 10월쯤부터 약을 서서히 줄였다. 그러다 남편이 던진 핵폭탄에 다시 약 증량, 공황 약과 수면제도 처방. 우울과 불안, 감정기복, 불면증, 무기력증, 공황 등이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또 증량. 수면제도 변경. 말로만 듣던 졸피뎀으로...
그러고도 며칠 전에 또 증량을 했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참 많다. 그래도 이번 용량이 맞는지 그동안 심했던 무기력증이 극복되고 있다. 잠을 잘 자고, 쌓였던 집안일들을 하고, 화분에 다시 공을 들이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 했지만 그냥 넘겼던 메뉴들이 이제야 생각이 난다. 나쁜 생각들이 사라지진 않지만 기분이 뭔가 산뜻하다.
그런데 이 기분은 진짜 나의 기분일까, 약의 조종일까? 증상이 조절되니 참 좋긴 한데 이러다 약을 끊을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는 게 사실이다. 평생 먹어야 되는 건 아니겠지? 약 부작용으로 입이 마르고 더워 죽겠고 식욕은 왕성해진다. 이러다가 옷 사이즈를 늘려야 될지도 모르겠다. 약을 먹자니 부작용을 감수해야 하고, 안 먹자니 다시 그 혼란들을 겪어야 하는 게 두렵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물었다.
- 이러다가 제가 약을 끊는 날이 올까요?
- 음.. 일단은 사셔야죠. 잠도 주무셔야 하고요.
맞아, 일단 살고 봐야 하니 걱정은 접자. 전에 들은 의사의 설명으로는 약으로 조절해서 좋은 기분을 계속 유지하다 보면 그게 습관처럼 돼서 약 없이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되는 거라고 한다. 요 며칠의 기분이 유지된다면, 이게 습관이 되고 내 성격이 된다면 좋을 일이니 열심히 먹어보자. 하루빨리 약을 안 먹고도 산뜻한 기분을 가질 수 있게 으쌰으쌰!! 앗, 이 또한 약의 조종인가? 어쨌든, 좋으면 됐지. 충실히 조종당해야지.
기분이 좋다. 햇살이 다시 예뻐 보인다. 오랫동안 이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