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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Oct 23. 2019

"이 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

<왜 힘들지? 취직했는데>를 읽다가 이 부분에 꽂혔다.


“…어쨌든 본인의 아이덴티티라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 다섯 개나 되었다. 옆방 브라질 친구는 또 어떤가. 스물 셋이었던 그녀는 자기의 ‘현재 직업’은 영양사이며 그것에 꽤 만족하지만 ‘앞으로’ 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될지는 모를 일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라는 명함을 한번에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는 것. 대신, ‘나는 이 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지금까지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 데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때까지의 삶과 앞으로 살고자 하는 삶을 한 두름으로 꿰어내는 청량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러나 뭔가 과거와 미래가 결합된 새로운 이름이 있어야만 남은 삶이 여분이 아닐 것 같았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이런 느낌?) 후보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발작적으로 블로그 타이틀만 바꾸었다. 그게 바뀌면 내 삶이 갑자기 눈 부셔지는 것처럼. 지금 생각하면 이 이름들은, 직업적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은 직업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고전평론가도 ‘어떤 사람’에 속하지만(일생을 통해 고전을 탐구하겠다는 의지 및 이걸로 먹고 산다는 정보) 심플하게 ‘남을 보살펴주는 사람’이라는 말도 왠지 어깨에 힘을 빼고 삶을 소풍처럼 살다 가겠다는 뜻으로 들려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들린다. 플러스 요즘의 나는 보그체의 엣지있는 답보다는 ‘남을 보살펴주는 사람’이라는 소박한 대답이 훨씬 끌린다. (뭔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에 지쳐있는 지도)


‘이 일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이 일종의 커리큘럼이자 재료이며, 적절한 발효기간과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란, 긴 호흡이다. 사회적인 간판으로만 나를 정의한다면 내 삶은 잠깐 빛났으나 의미없는 정체성과 긴 모호함을 지닌 가늘고 긴 것이 되겠지. 이 질문은 생물학적 시기를 매 단계 진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


그렇다면 나는 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 기업의 마케터, 글쓰기, 재능/기질과 커리어의 연결, 이성과 논리의 지향, 동시에 은밀한 미스터리(타로+@)의 세계의 탐색. 그리고 이를 공식화했던 모던마녀 쇼핑몰. 올해 내가 선택한 '어떤 사람'은 내면의 양지(기업, 이성과 논리의 세계)와 음지(타로+@의 세계)를 통합하는 사람이다. <워킹우먼 100인 아무튼 타로 프로젝트>는 이 사람으로 가는 첫발자욱이 될 듯. 그러므로 어떻게든 달성해야...하는게 맞겠지?



https://blog.naver.com/spillthebean/221682477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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