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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Jun 26. 2017

조직에서 수용될 수 없는 감정은
'나쁜 것'일까?

<나쁜 감정은 나쁘지 않다(by 권수영)>를 읽고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강경파 감정과 온건파 감정이다. 

온건파 감정은 밖으로, 즉 남을 향하기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향하며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슬픔, 수치심, 모멸감이 이에 속한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자신에 대한 연민도 넣고 싶다. 이런 감정들은 오래 지속되면 사람을 울적하고 처지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강경파 감정은 밖을 향한다. 나는 이를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고 표현한다. 또한 강경파 감정에는 원심력이 있어 일단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고 결국 의도치 않게 타인과 자신을 상처 입힌다는 특징이 있다. 분노, 짜증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언뜻 보기에 강경파 감정은 ‘나빠보인다’. 그러나 사실 강경파 감정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음의 시스템의 작용이라고 한다. 마음의 시스템 속에 유배된 ‘유배자’ 감정이 뜻하지 않게 탄로나게 된, 즉 아웃팅 당하게 된 상황에서, 강경파 감정은 마치 ‘소방관’처럼 등장해, 에너지의 방향을 돌려 발산시킴으로써 위기에 처한 ‘유배자감정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정을 받느니 차라리 미움을 받겠다’ 라는 말은 강경파 감정의 존재 이유를 잘 드러내준다. 


 그런데 이 말은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를 전제로 하고 있다. 기쁨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로써 권장되는 데 왜 슬픔은 억눌러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직 사회화가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기쁘면 웃고, 슬프면 웃는다. 즉 생물학적으로 슬픔과 기쁨이라는 감정은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미이다.슬픔이 드러내서는 안 될 덕목이 된 것은 대도시에서의 사회생활, 특히 2차 집단에서의 자신의 위치나 관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알고보니 자기 감정을 부정하고 있었던 캔디]


 인간관계가 다소 표면적인 2차 집단에서 한 멤버의 슬픔은 다른 멤버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는 전학 온 첫날 떠나온 곳을 떠올리며 눈물짓지만 그날 라일리를 처음 만난 반 친구들은 이 눈물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원래 슬픔은 논리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이다. 가족의 죽음을 겪었다, 라고 한다면 누구나 지금 저 사람이 슬픈 상태임을 인지하며 그에 걸맞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을 알지 못하는 슬픔에는 그 누구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야단을 친 것도 아닌데 상대가 갑자기 운다면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죄책감이 느껴지고 수근거리는 주변의 눈초리도 따갑다. 슬픔을 나눴더니 반이 되는 경우는 1차 집단에서 만이다. 2차 집단에서 슬픔은 관계를 한층 더 불편하게 할 뿐이다. ‘주책없이’ 슬픔을 드러낸 당사자는 ‘프로’답지못한 인물로 간주되어 좋지 않은 평판을 얻는다. 

 따라서 슬픔은 아주 가까운 1차 집단에서만 허용되는 감정이다 (물론 친구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친구는자신의 당황스러운 감정조차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이유를 몰라도 같이 울어주기도 하고. 그것으로 나를 낙인 찍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편안하다)


 반면 강경파 감정인 분노는 오히려 슬픔보다 사회적으로 용납된다. 사회생활에서 분노는 촉발되는 이유가 분명하다. 그것이 다수의 공감을 얻는 주제거나 ‘우리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유가 다소 비이성적이다 할지라도 대개는 넘어가준다. 솔직히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사회생활에서 분노의 표현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가정에서 분노는 맥락 없이 나타나지만 사회적 생명이 걸린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은 목적의식을 갖고, 보다 신중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때의 분노는 대개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동시에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분노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본인과 구성원의 이성에 의해 수습된다. 즉 이유와 해결방법이 분명하다 (비록 술자리의 억지 화해로 끝날지언정).분노는 주변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수는 있어도,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분노와 슬픔, 둘 다 2차집단에서는 버거운 감정이 맞다. 하지만 분노는 그 당사자에게 원인이 귀속되는 반면, 슬픔은 집단의 멤버들이 괜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마치 같이 슬퍼하지않으면 냉혈한처럼 느껴지는 등 일종의 감정 강요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매너가 있는 자라면 마땅히 자제해야 할, 기피대상 1호 감정이되었을 것 같다.  


 한편, 온건한 감정을 감추는 용도로 강경파 감정을 불러내는 게 아니라, 뭐랄까 이를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인물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캔디형 인간이’다. ‘외로워도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라는가사가 이렇게 자기 폭력적인 것일 줄이야.

 실제로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입사한 이십대 초반의 신입사원이었는데 야단을 맞고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친구를 생각하면 자기가 겪고 있는 힘듦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래서 웃는다고 했다. 이 신입은 정말로 구김살없이 잘 자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자기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이었을까. 당시는 마냥 부럽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마음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있던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P.S.<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고 싶다. 슬픔이가 뒤로 몰리자, 버럭이가 등장했는지 확인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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