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쥐아저씨 Oct 07. 2017

고민을 들어주는 파출소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세상 가장 행복했던 어느 경찰아저씨 이야기



#1. 만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잔뜩 마음에 지고 온 밤 산책 길이었다.

어휴. 어느 덧 직장생활 10년 차.

조금 이르게 주어진 '과장' 이라는 역할 놀이에서 왜 청춘의 시절에 가장 많은 봉급을 담보하는지,

그 이상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데 얼마나 많은 '나' 를 놓아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던 밤이었다.

사람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으로 일이란 것을 해왔던 내게, 속칭 KPI 라는 것 때문에 타인과 밀당하게 하는 역할 및 내 스스로도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채근하고 또 채근해야 한다는 것은, 그 좋아하던 밤 산책 길을 반성과 참회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느 하루 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할 거리를 찾던 나의 눈에 문득 집 옆 치안센터의 어두운 창가에 붙여진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들어 왔고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빙긋 하고 웃었다. 모처럼만에.




'고민과 걱정거리를 상담해 주는 파출소'.


이 신선하면서도 따사로운 발상이 어떤 분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더욱이 글을 쓰는 요즘은 <시골경찰> 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뒤끝이기에 이 아이디어를 낸 분을 만나 손 꼭 잡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팬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찰' 이라는 존재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자극했던가. 나의 '문제' 로 철창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철창안에 갇힌 나' 를 꺼내주는 경찰의 모습은 얼마나 듬직할 것인가.

고민을 상담해 줄 그는 어떤 모습일까. 모든 청춘의 풀리지 않는 고민인 '직장문제' 에 대한 그의 해결은 범죄에 대한 수사만큼 시원시원 할 까.



#2. 어루만지다


다음날 밤에 귀가해 보니 빌라가 온통 소란스럽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10세대가 옹기종기 살아가는 작은 빌라와 맞닿은 3층 당구장에서 상업용 에어컨 환풍구를 빌라쪽으로 벌려 놓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안그래도 심야 영업 시에 새어나오는 환한 불빛으로 나 역시 수면에 방해를 받던 찰나였었고, 이미 빌라 구성원들과 당구장 주인간에는 고성이 한 차례 오간 뒤였다.


열기가 아침 햇살에 조금 사그러 든 오전. 빌라 구성원들은 당구장 주인이 말한 대로 '법대로 해 보기 위해',

우선 가까운 경찰서를 찾아갔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이 방문해서 하신 첫 말씀은 이랬다고 한다.


"아, 바쁘시겠지만 상담할 것이 하나 있어서 왔어요"


심각한 상황인데, 나는 그만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않은 이 부분에서 혼자 웃어버리고 말았다. 행복한 웃음.

그리고, 화가 잔뜩 난 표정을 담고 있었을 아주머니들께 동네 경찰관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아이고, 어떤 상담이 필요하세요. 


저도 남의 고민을 해결해 줄 만큼의 지혜는 없지만 열심히 들어 드릴수는 있어요.


함께 이야기 해 봐요.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커피도 한잔 하시구요."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아주머니들은 이 환대에 어리둥절 했고, 경찰관 아저씨는 세상에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심정을 알 것만 같아서 나는 괜히 웃었다가 뭉클했다가 마음이 요동쳤다.

물론, 상담이 그 상담이 아니어서 경찰관 아저씨는 내심 많이 속상하셨겠지만.

얼마나 기뻤고, 행복했고, 설레였을까. 누군가가 나와 생각을 나누려고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경찰이 된다는 것이.


나를 더욱 어루만져 준 것은 '남의 고민을 해결해 줄 만큼의 지혜는 없지만 들어드리겠다' 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상담이라는 것을 하러 온다면 첫 번째로 해 주고 싶었던 이 말을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자신을 가다듬고, 말과 단어를 고르며 준비했을 지 정성과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 만큼 준비했다는 것은 타인의 고민 상담이란 '하는 것' 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것' 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본다. 흔히 문답으로 원인과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것을 업으로 하는 논리적이고 무서운 경찰 아저씨의 삶에도 듣는다는 것은 봉사를 넘어 꽤나 큰 도전이었고, 어쩌면 해결을 위해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심으로 해 보고 싶었던 사건 해결이 아니었을까.


들으며,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따스한 말 한마디.

이 어리둥절한 환대에 정작 경찰 아저씨에게 화난 상태로 민원을 넣을 수 없어서 우물쭈물 설명만 하다가 가까운 부동산에 가서야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이슈들을 따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경찰 아저씨는 행복한 표정과 저 몇 마디 말로 멋지게 고민을 해결해 준 셈이다.

아울러, 직장생활 속 사람관계에서 한창 화병이 치밀어올라 혼자 씩씩대던 내 맘까지 다독여 주셨으니,

가히 최고의 상담사라고 할 만 한 분이다.





사실. 이 글 말미에는 '잘 듣는 것이 행동하는 해결보다 낫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나 더 쓰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뻔히 아는 것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과제인 만큼 굳이 써서 남기는 것 보다 경찰 아저씨의 해맑았을 웃음을 떠올리며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어렵게 한 고민 역시 내가 잘 들어주지 못한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서 기대를 받고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나는 아직 빌라 구성원 분들 처럼 내 앞의 문제 해결이 급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흘러 나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해결해 줄 만큼의 지혜는 없지만 마음을 다해 들어줄게요. 함께 이야기 해 봐요"


라고 그 순간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민함을 사랑해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